항목 ID | GC600043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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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禾場洞農幕-堂山祭 |
이칭/별칭 | 화장동 농막마을 동제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의례/제 |
지역 | 광주광역시 남구 화장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지현 |
중단 시기/일시 | 1940년대 일제강점기 말 - 화장동 농막마을 당산제 중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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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 장소 | 할아버지 당산 - 광주광역시 남구 화장동 농막마을 뒤 |
의례 장소 | 할머니 당산 - 광주광역시 남구 화장동 농막마을 앞 |
성격 | 마을 공동 제사 |
의례 시기/일시 | 정월 열나흗날 밤 |
신당/신체 | 할아버지당산[팽나무]|할머니당산[입석] |
[정의]
광주광역시 남구 화장동 농막마을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정월 열나흗날 밤에 지내는 마을 공동 제사.
[개설]
화장동 농막마을 당산제는 정월 열나흗날 밤에 농막마을의 할아버지당산과 할머니당산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며 마을 공동으로 지내는 제사이다.
[연원 및 변천]
농막마을은 일제강점기 때 동양척식회사의 농장과 움막이 있어 농막이라 이름 지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농막마을은 영산강변의 넓은 평야와 마을 뒤 등용산과 봉황산이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농막 당산제는 일제강점기 말부터 중단되어 왔으며, 현재도 진행되고 있지 않다.
[신당/신체의 형태]
농막마을의 당산은 할아버지당산과 할머니당산 두 곳이다. 할아버지당산은 마을 뒷산에 있는 팽나무이고, 할머니당산은 마을 앞에 있는 입석이다. 할아버지당산은 고사(枯死)되어 없어지고, 할머니당산도 오래 전에 사라져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절차]
화장동 농막마을 당산제는 정월 초이레에 제를 모시기 위해 마을회의를 열어 화주 1명, 축관 1명 등 2명을 선출하여 당산제에 관한 전반적인 것을 일임한다. 이때 제관(祭官)은 제일(祭日)과 생기복덕(生氣福德)[생기법으로 본 길일과 사람이 태어난 생년월일의 간지를 팔괘로 나누어 가린, 길한 일진의 날]이 맞는 사람을 선정한다. 화주로 선정되면 당산제를 지낼 때까지 궂은 곳에 가지 않고, 궂은 음식을 먹어서도 안 되는 등 여러 가지 금기를 지켜야 한다. 제관으로 선정되면 당산제를 지내기 일 주일 전부터 준비에 들어가는데, 매일 밤 찬물로 목욕을 하고, 화장실에 다녀와도 다시 목욕을 해야 할 정도로 정성을 들인다. 제비(祭費)는 인구전으로 충당되는데, 남녀노소 상관없이 일률적으로 자진해서 내놓아 제를 지낼 당시 어려움은 없었다고 한다. 제물(祭物)의 구입은 화주가 하는데, 제물을 구입하러 갈 때 목욕재계를 하고, 물건을 살 때에도 물건값을 깎지 않는다. 제사에 쓰일 음식을 장만할 때는 정갈하게 준비하기 위하여 떡방아를 찧거나 음식을 만들 때도 수건으로 입을 가렸다고 한다. 제를 지내기 3일 전이 되면 당산 주변과 샘, 화주집 앞 등에 금줄을 치고 금토를 깔아 부정의 출입을 막는다. 제일(祭日)이 되면 화주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 모두 당산 주변과 골목을 깨끗이 청소한다.
정월 열나흗날 초저녁이 되면 농악대가 마을을 돌며 제일임을 알리고 사람들을 모은다. 제를 지낼 시간이 되면 흰색 한복으로 제복을 갖춰 입은 제관과 농악대가 화주집으로 가서 제물을 나눠 들고 할아버지당산으로 이동하여 제사를 지낸다. 할아버지당산의 제사는 유교식 제차(祭次)에 의해 지낸다. 할아버지당산에서 제가 끝나면 다시 할머니당산으로 이동하는데, 이때 제사에는 화주와 축관, 농악대만 참여한다. 할머니당산에서는 별다른 제차 없이 술 한 잔만 따라 올리고 굿을 치는 것으로 대신한다. 제사가 모두 끝나면 음식의 일부를 덜어내어 흰 종이에 싸서 당산에 묻어 헌식하고, 나머지는 가지고 내려와 마을 사람들이 나눠 먹으며 음복한다. 특히 당산에 올렸던 백설기는 약떡이라고 하여 마을 사람들이 모두 조금씩 나눠 먹는다.
[축문]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내용의 축문을 읊었다고 하나, 구체적인 내용은 확인할 수 없다.
[현황]
화장동 농막마을 당산제는 일제강점기 말에 중단되어 현재는 진행되고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