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43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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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雙巖洞鷹巖-堂山祭 |
이칭/별칭 | 쌍암동 응암마을 동제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의례/제 |
지역 | 광주광역시 광산구 쌍암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부유진 |
중단 시기/일시 | 1945년 8.15광복 이후 - 쌍암동 응암마을 당산제 중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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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 장소 | 할머니당산 - 광주광역시 광산구 쌍암동 응암마을 뒤 |
성격 | 마을 공동 제사 |
의례 시기/일시 | 정월 열나흗날 밤 |
신당/신체 | 할머니당산[은행나무] |
[정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쌍암동 응암마을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농을 기원하기 위해 정월 열나흗날 밤에 지내는 마을 공동 제사.
[개설]
쌍암동 응암마을 당산제는 정월 열나흗날 밤에 응암마을의 할머니당산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농를 기원하며 마을 공동으로 지내는 제사이다.
[연원 및 변천]
응암마을은 매가 바위를 나르다가 마을 동서 양편에 하나씩 떨어뜨렸다 해서 마을 이름을 매바위, 즉 응암(鷹巖)이라 하였다 한다. 마을은 18세기 무렵 탐진최씨(耽津崔氏)와 청주한씨(淸州韓氏) 등이 들어와 살면서 형성되었다. 당산제는 마을 형성 이후부터 지냈던 것으로 보이며, 8.15광복 이후 전승이 중단되어 현재는 진행되고 있지 않다.
[신당/신체의 형태]
응암마을의 당산은 할머니당산으로 마을 뒤편에 있는 은행나무가 신체 역할을 한다.
[절차]
쌍암동 응암마을 당산제는 정월 5일경 마을회의를 열어 화주, 제관, 축관 등을 선출한다. 특히 화주는 선정된 날부터 동네 밖 출입을 삼가며, 제가 있을 때까지 소변을 보면 세수를 해야 하고, 대변을 보면 목욕 후 옷을 갈아입어야 하였다. 제비(祭費)는 각 호당 거출하였다. 제물(祭物)은 화주와 마을의 정결한 사람이 함께 구입하는데, 물건값을 깎지 않는다. 제물은 과일, 나물, 마른 명태 등을 매우 간단하게 하며, 화주집에서 부인들이 도와 제수(祭需)를 장만할 때에는 남자들은 출입을 금하였다. 제기(祭器)는 매년 새로 구입하며, 제사가 끝나면 화주가 소유한다. 제기는 화주만 사용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웃에서도 빌려가지 않는다.
정월 열나흗날 저녁이 되면 농악을 쳐서 마을 사람들을 모은다. 보통 한참을 놀고 난 후 화주집으로 가서 제물을 가지고 할머니당산에 오른다. 화주, 축관, 제관, 집사 등과 마을 어른, 굿꾼 등은 제사에 직접 참여하고 이외의 마을 사람들은 구경을 한다. 제관들은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유건을 썼다. 제사가 끝나면 마을 앞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밤새 놀았다.
[축문]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내용의 축문을 읊었다고 하나, 구체적인 내용은 확인할 수 없다.
[부대 행사]
당산제가 끝나고 정월 대보름날부터 그믐날까지 마당밟이가 이어진다. 먼저 공동샘에서 굿을 치고 각 가정을 돌았다. 이때 집집마다 내놓은 음식, 술 등은 함께 먹고, 쌀은 마을 공동 자금으로 사용하였다.
[현황]
쌍암동 응암마을 당산제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의 탄압으로 당산제를 지내는 데 어려움이 있었으나, 지서의 승낙을 얻어내어 제를 모셨다고 한다. 8.15광복 이후 당산제에 관심이 많으신 노인들이 작고하자 젊은이들이 제를 모실 수 없어서 전승이 중단되었으며, 현재는 진행되고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