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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3583
한자 芙蓉山
영어공식명칭 Buyongsan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작품/음악·공연 작품 및 영상물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유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창작|발표 시기/일시 1948년연표보기 - 「부용산」 창작
성격 가곡
작곡가 안성현
작사자 박기동

[정의]

박기동이 죽은 여동생을 추모하며 쓴 시에 안성현이 작곡한 한국적 애상과 서정의 대표적 가곡.

[개설]

작곡가 안성현은 일본 도쿄의 도호 음악대학 성악부를 졸업하고 귀국한 뒤 전남여자고등학교, 광주사범학교, 조선대학교 등지에서 강의하다 1947년 목포항도여자중학교의 음악교사로 재직하였다. 작사가 박기동이 1947년 순천사범학교 재직 중 시집갔던 큰 누이동생 박영애가 순천도립병원에서 폐결핵으로 죽었다. 박기동은 고향 벌교의 부용산에 누이동생을 묻고 돌아와 동생을 추모하는 시 '부용산'을 썼다. 그리고 박기동은 1948년 목포항도여자중학교로 전근을 갔다. 목포항도여자중학교 3학년에는 김정희라는 문예 방면에 뛰어난 소질이 있는 학생이 경성사범학교에서 전학 와 재학 중이었다. 이 해에 김정희가 폐결핵으로 죽자 박기동은 장지까지 따라나섰고, 안성현은 박기동의 시 '부용산'에 곡을 붙였다. 노래를 잘하는 상급반 학생 배금순이 「부용산」을 불렀고, 이 노래는 순식간에 학교와 전라남도 광주, 전남 일대로 퍼져 나갔다. 이 두 가지 사건으로 인하여 「부용산」 노래의 두 가지 배경설이 남게 되었다. 노래 「부용산」은 누이동생을 추모하는 '제망매가'라는 설과 제자를 위한 '애제자곡'이라는 설이다.

[공연 상황]

「부용산」은 구전되어 사람들에게 퍼져 나갔는데, 학생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수감된 학생들이 빨치산 비전향 장기수들로부터 배웠다가 출옥하면 후배들에게 알려 주기도 하였다. 가수 안치환은 「부용산」을 1997년 자신의 앨범 『Beyond nostalgia』에 수록하였다.

[구성]

「부용산」은 불규칙한 세 도막 형식의 나단조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

「부용산」 가사

부용산 오 리 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의의와 평가]

작사가 박기동은 전라남도 벌교 출신으로 일본 유학을 다녀온 지식인이다. 작곡가 안성현은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에서 가야금 산조의 명인 안기옥의 아들로 음악성을 물려받았으며, 함경남도 함흥에서 성장하고 일본에서 음악을 공부하였다. 박기동과 안성현이 만든 노래 「부용산」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노래가 만들어진 배경에는 정치나 사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지리산에 숨었던 빨치산들이 많이 불렀다. 빨치산이라 불리는 청년들도 피어나지 못한 병든 장미가 시들어진다는 대목을 자신들의 처지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안성현이 월북 작곡가라는 이유로 「부용산」은 금지곡이 되었다. 하지만 호남 권역에서는 운동가들 사이에 구전되었고 인기 있는 노래가 되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는 자유롭지 못한 공안 정국 하에서 민주화운동을 전개하던 청년들의 심정은 이겨 낼 수 없는 운명에 대한 좌절감과 허탈함을 담은 시와 서정적 단조로 담아낸 비장한 선율의 정서가 자신들의 처지와 흡사해 많이 불렀을 것이라고 짐작해 본다. 특히 전라남도 광주에서 대학을 다녔던 1960년대 학번의 선배들은 「부용산」을 매우 좋아하여 현재도 그들의 애창곡으로 남아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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