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22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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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식명칭 | Seo Hobi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진우 |
출생 시기/일시 | 1960년 11월 5일 - 서호빈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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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80년 5월 - 서호빈 전남대학교 2학년 재학 |
활동 시기/일시 | 198년 5월 21~27일 - 서호빈 5.18민주화운동 학생수습대책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
몰년 시기/일시 | 1980년 5월 27일 - 서호빈 사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7년 5월 - 전라남도 여수시 묘소에서 국립5.18민주묘지로 이장 |
학교|수학지 | 전남대학교 - 광주광역시 북구 용봉로 77[용봉동 300] |
활동지 | 옛 전라남도청 - 광주광역시 동구 문화전당로 26번길 |
묘소 | 국립5.18민주묘지 - 광주광역시 북구 민주로 200[운정동 563] |
성격 | 5.18민주화운동 유공자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전남대학교 학생|학생수습대책위원회 위원 |
[정의]
전라남도 광주시에서 유학하였던 5.18민주화운동 유공자.
[개설]
서호빈[1960~1980]은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대학교 화학공학과 2학년 재학 중 학생수습대책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던 중 5월 27일 옛 전라남도청에서 계엄군의 총격을 받아 사망하였다.
[활동 사항]
서호빈은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대학교 화학공학과 2학년 재학 중 학교 근처 하숙집에 거주하고 있었다. 5월 21일 하숙집에 계엄군이 쳐들어왔으나, 서호빈은 하숙집 주인의 도움으로 붙잡혀 가지 않았다. 그날 저녁 서호빈은 시내로 나가 계엄군의 만행을 목격하고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서호빈은 함께 하숙하였던 친구와 전라남도청에서 사망자의 입관과 분향을 돕는 등 학생수습대책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5월 26일 계엄군이 전라남도청을 진압한다는 소식을 접한 서호빈의 여자 친구가 전라남도청에서 나가자고 하였지만 서호빈은 계속해서 남아 있었다.
5월 27일 항쟁 마지막 날 새벽, 서호빈은 계엄군의 총탄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사망 원인은 우흉부 관통, 좌우 하퇴부 관통 등 총상이었다. 서호빈의 여자 친구는 전라남도청에서 서호빈의 시신을 수습하여 입관하고 상무관에 안치시킨 뒤 전라남도 여수시에 사는 서호빈의 가족에게 알렸다.
서호빈의 가족은 5월 27일 저녁 무렵 광주시에 도착하였는데, 시신은 이미 망월묘지공원[5.18구묘지]에 안장된 뒤였다. 장례가 끝난 뒤 가족들은 경찰의 협박과 회유로 서호빈의 시신을 여수시로 이장하였다. 1997년 5월 국립5.18민주묘지로 이장되었다.
[묘소]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묘지번호는 2-40이다.
[상훈과 추모]
「5.18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라 5.18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