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22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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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식명칭 | Bak Byeonggyu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진우 |
출생 시기/일시 | 1961년 5월 4일 - 박병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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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80년 5월 - 박병규 동국대학교 1학년 재학 |
활동 시기/일시 | 1980년 5월 19~27일 - 박병규 전라남도청에서 학생수습대책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
몰년 시기/일시 | 1980년 5월 27일 - 박병규 사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7년 5월 - 전라남도 나주군 금천면 선산에서 국립5.18민주묘지로 이장 |
학교|수학지 | 동국대학교 -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로1길 30[필동3가 26-1] |
활동지 | 옛 전라남도청 - 광주광역시 동구 문화전당로 26번길 |
묘소 | 국립5.18민주묘지 - 광주광역시 북구 민주로 200[운정동 563] |
성격 | 5.18민주화운동 유공자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동국대학교 학생|학생수습대책위원회 위원 |
[정의]
전라남도 광주시 출신의 5.18민주화운동 유공자.
[개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동국대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병규[1961~1980]는 전라남도 광주시로 내려와 학생수습대책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다가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총격을 맞고 사망하였다.
[활동 사항]
1980년 당시 박병규는 동국대학교 서울 캠퍼스 1학년에 재학 중이었는데, 학교 근처에서 자취하고 있었다. 5월 18일 이후 대학생들의 시위가 계속되고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자, 아들이 걱정된 박병규의 부모는 박병규를 전라남도 광주시의 집으로 내려오게 했다.
5월 19일 광주시에 내려온 박병규는 다음날부터 친구들과 함께 시위에 참여하였다. 계엄군이 광주 시내에서 물러가고 시민군이 전라남도청을 접수한 뒤 박병규는 두 차례 집에 들어왔다. 박병규는 학생수습대책위원회에서 일하며 목격한 내용을 가족들에게 전하고 다시 전라남도청으로 들어갔다. 5월 26일 전라남도청에 있었던 박병규는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어머니에게 안부 전화를 한 뒤, 5월 27일 새벽 전라남도청에서 계엄군의 총격을 맞고 사망하였다.
소식을 들은 가족들이 박병규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전라남도청 근처 상무관으로 갔으나, 시신은 이미 망월묘지공원[5.18구묘지]으로 옮겨진 뒤였다. 가족들은 박병규의 시신을 수습하고, 전라남도 나주군 금천면에 있는 선산(先山)으로 옮겼다. 1997년 5월 국립5.18민주묘지로 이장되었다.
[묘소]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묘지번호는 2-36이다.
[상훈과 추모]
「5.18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라 5.18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