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22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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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식명칭 | Kim Mandu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진우 |
출생 시기/일시 | 1936년 2월 5일 - 김만두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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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80년 5월 21일 - 김만두 광주역 근처 시위 현장에서 총탄 부상 |
몰년 시기/일시 | 1980년 5월 23일 - 김만두 사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0년 5월 31일 - 5.18구묘지 안장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7년 6월 - 5.18구묘지에서 국립5.18민주묘지로 이장 |
활동지 | 광주역 - 광주광역시 북구 무등로 235[중흥동 611-8] |
묘소 | 국립5.18민주묘지 - 광주광역시 북구 민주로 200[운정동 563] |
성격 | 5.18민주화운동 유공자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공사장 근로자 |
[정의]
전라남도 광주시 출신의 5·18민주화운동 유공자.
[개설]
김만두[1936~1980]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금남로 공사장에서 일하던 근로자였다. 5월 20일 최루탄 가스 때문에 일이 중단되어 김만두는 출근을 안 하고 시위 현장에 나갔다가 계엄군이 쏜 총탄에 맞아 병원에서 사망하였다.
[활동 사항]
김만두는 1980년 5월 18일 전라남도 광주시 금남로[광주광역시 동구 관내 명예도로로 지정된 유네스코 민주인권로] 공사장에서 아내와 함께 일을 하고 있었는데,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을 향해 계엄군의 무차별 폭력이 자행되는 것을 목격하였다. 김만두는 다음날에도 공사장으로 출근하였고, 전날보다 더 심한 계엄군의 진압 광경을 보았다. 김만두는 계엄군이 쏜 최루탄 가스 때문에 더 이상 일을 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5월 20일 일을 나가지 않고 있던 김만두는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저녁에 시위 현장으로 나갔다. 5월 21일 새벽 5시경 아내에게 시외버스공영터미널[지금의 광주광역시 동구 제봉로 225] 부근 병원에 남편이 누워 있다는 전화가 걸려 왔다. 5월 21일 새벽 1시쯤 김만두는 광주역 근처에서 총탄에 맞아 학생들에게 실려 병원에 온 것이다.
병원으로 향한 아내는 김만두를 큰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는 말에 광주기독병원으로 옮겼다. 수술이 필요했지만 5월 21일 계엄군의 집단 발포 이후 사상자가 계속 밀려들어 바로 수술을 받을 수 없었다. 결국 5월 23일 사망하였다. 사망 원인은 배흉부 맹관 총상이었다.
김만두의 시신은 전라남도청과 상무관을 거쳐 5월 31일 망월묘지공원[5.18구묘지]에 안장되었다. 1997년 6월 국립5.18민주묘지로 이장되었다.
[묘소]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묘지번호는 1-98이다.
[상훈과 추모]
「5.18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라 5.18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