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22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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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琪中 |
영어공식명칭 | Kim Gijung |
이칭/별칭 | 김화기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노기욱 |
[정의]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활동한 전라남도 광주 지역 출신의 독립유공자.
[개설]
김기중(金琪中)[1921~2010]은 1921년 전라남도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 130[지금의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김화기(金和基)이다. 1940년을 전후하여 일본 유학 중 사상 연구단체를 조직하여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을 비판하였다. 이 때문에 1942년 4월 18일 일본 아사가와현[[石川縣] 가나자와[金澤]지방재판소 검사국에서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활동 사항]
김기중은 1941년 일본 아사가와현 가나자와에 있는 제4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 동교생 조선인 조옥래(趙玉來) 등으로부터 사회주의 연구를 위한 독서회를 결성할 것을 제안받고 동참하였다. 1941년 2월 박응포(朴應苞) 등 5명과 함께 한국의 독립과 혁명을 목적으로 조선청년맑시즘연구회[CYMS]를 조직하였다. 그 뒤 재일 한인 학생의 졸업생 송별회, 신입생 환영회, 친목회, 독서회 등 모든 모임에 참석하며 조선청년맑시즘연구회 활동을 하였다.
김기중은 조선총독부의 창씨개명, 한글 사용 금지, 지원병 제도, 납세 정책 등 고국에서 일어나는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을 비판하였다. 더 나아가 한국인 본위의 의무교육 실시, 민족 차별 정책 폐지 등을 주장하며 조국의 독립을 도모할 것을 조선청년맑시즘연구회 회원들과 논의하였다. 또한 1941년 9월 초순부터 도야마[富山]고등학교 학생 최정률(崔定律)과 도야마약학전문학교 학생 노성완(盧性完) 등과 여러 차례에 걸쳐 회합을 갖고 민족독립을 성취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러한 활동이 일본 경찰에 탐지되어 1942년 2월 18일에 체포되었다. 1942년 4월 18일 아사가와현 가나자와지방재판소 검사국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송치되어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상훈과 추모]
1995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