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20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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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德順 |
영어공식명칭 | Kim Deoksu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노기욱 |
출생 시기/일시 | 1901년 8월 8일 - 김덕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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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0일 - 김덕순 광주 3.1운동 주도 |
몰년 시기/일시 | 1984년 6월 9일 - 김덕순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08년 - 김덕순 대통령 표창 추서 |
출생지 | 전라남도 광주군 본촌면 |
거주|이주지 | 전라남도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여 |
대표 경력 | 수피아여학교 학생 |
[정의]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광주 3.1운동을 전개한 여성 독립유공자.
[개설]
김덕순(金德順)[1901~1984]은 1901년 전라남도 광주군 본촌면[지금의 광주광역시 북구]에서 태어났다. 1919년 전라남도 광주 수피아여학교 재학 중 3월 10일과 3월 13일 광주 3.1운동 기간에 태극기 등을 광주 학생들에게 배포하고, 수천의 군중과 함께 광주천변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다.
[활동 사항]
김덕순은 1919년 3월 10일 18세 나이에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면의 광주 3.1운동 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6일 김복현(金福鉉), 김강(金剛), 서정희(徐廷禧) 등은 숭일학교 교사 최병준(崔丙浚), 수피아여학교 교사 박애순(朴愛順) 등과 독립만세 시위를 결행하기로 계획하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는 등 사전 준비를 하였다.
광주 큰장날인 1919년 3월 8일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지금의 부동교(不動橋) 부근 넓은 백사장에 작은장이 섰고, 석서정(石犀亭) 앞 천변에 큰장이 섰다. 광주의 큰장과 작은장은 호남 지방의 대표적인 장으로 장날이면 호남 각지에서 장꾼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광주 3.1운동을 추진하기에는 준비 기간이 짧아서 다시 작은장날인 1919년 3월 10일 오후 3시 30분으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1919년 3월 10일 오후 3시경, 부동교 아래의 작은장터에는 박경주(朴京柱), 박일구(朴一求), 홍승애(洪承愛) 등과 기독교인, 숭일학교·수피아여학교·광주공립농업학교 학생 및 일반 주민이 모여 독립만세 시위 군중은 1,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때 김덕순은 동지들과 함께 작은장에서 광주 3.1운동 시위에 격문, 독립가 등 태극기를 광주 학생들에게 배포하고 1,0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시위대는 각 방향에서 조직적으로 참여하였는데, 양림동 방면에서는 기독교인과 숭일학교·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이 광주천(光州川)을 따라 내려왔다. 서문거리로는 많은 광주 시민들이 몰려오고, 북문 쪽에서는 광주공립농업학교 학생들과 시민들이 만세 시위를 벌였다. 또한 광주군 지산면 쪽에서는 이주상(李周庠)이 이끌고 온 수백 명의 주민이 달려왔다. 이렇게 모여드는 군중을 상대로 숭일학교·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이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고, 시위 군중은 태극기를 휘날리고 "조선 독립 만세"를 부르며 시장을 출발하였다. 이들은 서문통(西門通)을 지나 우편국을 돌아 본정통(本町通)을 행진하는 등 전라남도 광주 거리를 누비며 광주 3.1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30일 김덕순은 광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월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2008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