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20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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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德善 |
영어공식명칭 | Kim Deokseo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노기욱 |
[정의]
일제강점기 농촌 청년 계몽에 앞장선 전라남도 광주 출신의 독립유공자.
[개설]
김덕선(金德善)[1904~1945]은 1904년 7월 17일 전라남도 광주부 광주읍 누문 165[지금의 광주광역시 북구 누문동]에서 태어났다. 1924년 7월 담양공립보통학교[지금의 담양동초등학교] 교사 시절 야학을 개설하여 문맹 퇴치에 앞장섰으며, 1927년에는 소비조합 운동을 전개하고 농촌 청년들의 항일독립운동 활동을 위한 단체를 규합·조직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활동 사항]
김덕선은 1924년 7월 담양공립보통학교에서 교사로 있으면서 동료 교사와 함께 담양 흥학관(興學館)에 야학을 개설하여 한글 보급 등 독립정신을 고취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10여 일 만에 석방되고 담양공립보통학교 교사직에서 면직당하였다. 1925년 4월에서 1927년 3월에 이르는 기간 동안 일본 도쿄[東京]의 일본대학에 유학하며 한국 학생 독립운동 단체에 가입하고 항일 독립운동의 국내 활동을 위하여 귀국하였다.
1927년 4월에서 1928년 8월에 걸쳐 담양 흥학관에서 야학을 재개하여 소비조합 운동과 더불어 농민 경제와 농업기술을 지도하며 농촌 청년들에게 항일 독립운동 활동을 위한 단체를 규합·조직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붙잡혔다. 1928년 8월 26일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경기도 경찰부에 구금되었으며, 1928년 9월 24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0년 12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31년 8월 9일 출옥하였다.
1932년 11월 29일 전라남도 광주 경찰에 전남노농협의회사건(全南勞農協議會事件)으로 다시 검거되었다가 강해석(姜海錫), 최종수(崔宗秀) 등과 같이 풀려났다. 1945년 12월 27일 사망하였다.
[묘소]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86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각각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