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20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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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卜實 |
영어공식명칭 | Kim Boksil |
이칭/별칭 | 먹통,누항촌 먹통,배재박치기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노기욱 |
[정의]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광주에서 활동한 체육인.
[개설]
김복실(金卜實)[1905~1952]은 전라남도 광주군 누항촌[지금의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에서 5형제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얼굴색이 검어서 '먹통'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1922년 정동예배당 앞에서 일본 학생 30명과 격돌하여 '배재박치기'라고 불렸다.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광주에서 축구·야구·정구 부분에서 심판·코치·감독·선수로 활동하였다.
[활동 사항]
김복실은 광주공립보통학교[지금의 광주서석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지금의 중앙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30년 3월 29일 학생운동에 연루되어 퇴학당하였다. 이때 일제는 전국적으로 학생운동 관련자 중 각 중등·전문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을 색출하여 19개교 232명을 퇴학시켰다. 이에 서울 배재고등보통학교[지금의 배재고등학교]로 전학하였다. 배재고등보통학교 3학년 시절 지금의 중국 선양[瀋陽]에 해당하는 펑텐[奉天]의 펑텐대학 야구선수로 스카우트되어 2년간 선수 생활을 하였다. 1930년대 호남은행 본점에서 야구부 투수로도 활동한 적이 있는 체육인이다.
1924년 전라남도 광주 최초로 창설된 축구클럽 갑자단(甲子團) 선수로 활약하였다. 그 후 광주읍성 남문 밖의 팀인 무호단(武虎團)과 광주읍성 북문 밖의 팀인 화성단(華城團)이 창설되었고, 다른 고장과의 경기 때에는 두 단체가 합해 광주축구단, 줄여서 광축(光蹴)이란 이름을 출전하기도 하였었다. 김복실은 전라남도 광주 최초의 축구단인 광축단 초대 단장을 맡았다. 광축단은 서울·평양·함흥 팀과 함께 전국 4강 팀으로 명성을 떨쳤다. 또한 김복실은 축구·야구·정구 부분에서 심판·코치·감독·선수 1인 4역을 수행하였다.
1945년 8월 18일 오전 10시 광주극장에서 수백 명의 청년이 모인 가운데 광주청년단이 창단되었다. 이날 결성대회에서 총단장에 김철이 추대되었고, 주봉식은 부단장으로 선출되었다. 광주 동부대장에는 문인걸, 서부대장에는 정성태, 남부대장에는 정영범, 그리고 북부대장에 김복실이 피선되었다. 1946년 가을 김복실은 체육인과 함께 '광주묵은바탕운동장[지금의 조선대학교 운동장]'에서 '광주시민운동회'를 개최하였다.
1949년 7월 10일 전라남도의회에서 전라남도체육회 부회장에 피선되었으며, 1949년 8월 7일 광주YMCA에서 전라남도야구협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김복실은 광주 주민을 위해 축구·야구·정구 등 체육 발전에 동분서주하다가 1952년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52년 전라남도 최초의 체육인장으로 치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