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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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允洙 |
영어공식명칭 | Kim Yunsu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임선화 |
[정의]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서 미국의 선교사 유진 벨과 오웬을 도와 활동한 종교인.
[활동 사항]
김윤수(金允洙)[1860~1919]는 함경남도 원산 출생으로 전라남도 목포에 왔다고 알려졌다. 김윤수가 기독교인이 된 계기는 어머니의 병으로 인해서였다. 어머니의 손이 곪았는데, 미국의 선교사 오웬(Clement C. Owen)[오기원]이 치료하여 완치되었다. 이후 교회에 다니게 되었는데, 처음 다녔던 교회는 목포교회였다. 김윤수는 목포에서 양조장을 경영하였는데, 개신교에서는 술을 금지하여 양조장을 처분하고 세례를 받았다고 알려졌다.
김윤수는 목포교회의 집사를 맡았는데, 선교사 유진 벨(Eugene Bell)[배유지]과 오웬이 전라남도 광주에서 포교할 때 이를 도왔다. 김윤수의 일은 선교사들을 전라남도 광주에 안내하고, 광주에서 선교를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을 조사(助事)라고 불렀다.
1904년 전라남도 광주에 도착한 이후 김윤수는 선교사들의 주택을 구하고 포교를 도왔다. 포교에는 김윤수의 부인도 함께하였다. 선교사들은 포교를 하는 한편, 조사들의 자식 교육을 위해 학당을 개설하였다. 수피아여학교와 숭일학교의 시작이었다. 김윤수의 딸도 학당에 다니며 근대 교육을 받았다. 전라남도 광주와 인근 지방에 포교가 순조롭게 되면서 신도의 수가 증가하였다. 양림동 선교사의 집에서 시작된 교회는 북문 안에 교회를 짓고 북문안교회라 이름을 붙였다. 북문안교회의 초대 집사는 김윤수와 최흥종이었다.
김윤수는 전라남도 광주 지역 개신교의 전파에 큰 공을 세웠고, 근대 교육의 시작에도 영향을 끼쳤다. 김윤수는 1919년 3.1운동 이전 장티푸스로 사망하였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