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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국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2013
한자 金昶國
영어공식명칭 Kim Changguk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노기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4년 1월 28일연표보기 - 김창국 출생
몰년 시기/일시 1950년 8월 11일연표보기 - 김창국 사망
성격 목사
성별
대표 경력 전남노회 회장

[정의]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광주에서 활동한 목사.

[개설]

김창국(金昶國)은 1884년(고종 21) 1월 28일 전라북도 전주에서 한의원을 운영하던 김제원(金濟元)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소년 시절에는 9년간 한문을 수학하였으며, 당시 선교사인 테이트(Lewis Boyd Tate)[최의덕(崔義德)]의 사동(使童)으로 일하였다. 1897년 7월 17일 세례를 받고 해리슨(William Butler Harrison)[하위렴(河緯廉)] 목사와 레이놀즈(William Davis Reynolds)[이눌서(李訥瑞)] 목사 등을 돕고 주일학교를 섬겼다. 1900년 9월 9일 레이놀즈 자택 사랑방에서 교육을 받게 되었는데, 이것이 신흥학교의 시작이었다. 김창국은 신흥학교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1905년 평양 숭실학교에 진학하였고, 1907년 졸업하였다.

1908년 양응도(梁應道)와 결혼하였는데, 양응도는 평양 숭의여학교 졸업생으로 전라남도 광주YWCA 초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김창국은 전라북도 군산으로 내려와 해리슨 목사를 도와 군산 영명학교와 금산 심광학교에서 교사로 일하였다. 1910년부터 전라북도 익산에서 전도사로도 근무하였다.1913년 4월 4일 둘째아들 김현승(金顯承)을 낳았다.

[활동 사항]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하면서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한 김창국은 1915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함으로써 호남 지역 최초의 신학교 졸업생이 된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임직을 받았으며, 전라북도 완주의 삼례교회 등 4개 교회를 담임하고 순회 목사로 목회를 하였다. 광주금정교회와 광주양림교회 등에서 목사를 지냈고, 전남노회(全羅老會) 회장을 세 차례 역임하였다. 1917년에는 전라노회에서 제주도 전도 목사로 임명하였다. 이에 6년 동안 제주도 전도를 담당하고, 내도리교회와 삼양리교회 등을 설립하였다.

1922년 4월 20일 전라남도 광주 숭일학교 강당에서 회집(會集)된 임시 전남노회에서 광주금정교회[지금의 광주제일교회] 당회가 제주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던 김창국을 제4대 담임 목사로 청빙 청원하자 그것을 허락하였다. 1922년 7월 16일 광주금정교회에 부임하여 위임식을 거행하였다.

한편 1920년 광주금정교회에서 북문밖교회[지금의 광주중앙교회]가 분립하고, 다시 1924년 광주양림교회가 분립하면서 황상호 장로는 금정교회에 남고, 나머지 장로 4인과 당회장 김창국 목사가 양림교회로 옮겨 갔다. 1925년 1월 7일자 『기독신보』에 '광주군 양림교회는 금정교회에서 분립하여 셋집을 얻어 작년 10월 둘째 주일부터 예배하였다.'라고 예배 모습을 전하였다. 1926년 9월 26일 전남노회 임원들과 광주금정교회 교인들과 광주중앙교회 교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광주양림교회 헌당식을 거행하였다.

1935년에 광주양림교회 부임 14주년 기념식, 1942년 11월 15일에 부임 20주년을 기리는 행사를 거행하였다. 김창국광주양림교회에서 5대 목사로 1947년 9월까지 봉직하였다. 둘째아들 김현승은 1936년 광주 숭일소학교에서 교사를 지냈으며, 시인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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