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9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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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彙進 |
영어공식명칭 | Yoo Hwijin |
이칭/별칭 | 언우(彦遇),죽오(竹塢)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바른 |
[정의]
조선 전기 전라도 광주 출신의 의병장.
[가계]
유휘진(柳彙進)[1556~1593]의 본관은 서령(瑞寧), 자는 언우(彦遇), 호는 죽오(竹塢)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시직(侍直) 유정(柳汀), 할아버지는 교수(敎授) 유희송(柳希松)이다. 아버지는 참교(參校) 유수(柳洙)이다. 부인은 목사(牧使) 고경조(高敬祖)의 딸 장택고씨(長澤高氏)이며, 아들은 유관(柳瓘), 유광(柳璜), 유박(柳璞)이다.
[활동 사항]
유휘진은 1556년(명종 11) 전라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도량이 넓고 성격이 활발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초토사(招討使)[조선 시대 변란이 일어난 지방에 파견한 임시 무관직] 고경명(高敬命)[1533~1592]과 군량을 모았다. 일찍이 김천일(金千鎰)[1537~1593]의 문인으로 따랐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 김천일이 유휘진을 부르자 군사를 이끌고 혈서로 격문을 만들었다. 유휘진은 근왕병(勤王兵)을 이끌고 강화도에 들어가 왜적 100여 명을 죽이는 공을 세웠다. 이 일이 알려져 조정에서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를 제수(除授)하였다. 진주성이 왜적에 포위되어 위급하자, 유휘진은 김천일과 함께 가서 구원하고자 하였으나 끝내 성이 함락되었다. 이에 1593년 6월 29일 촉석루에 올라 김천일 등 여러 의사(義士)들과 함께 강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상훈과 추모]
유휘진은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가, 1788년(정조 12)에 자헌대부(資憲大夫)·호조판서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가 더하여졌다. 1796년에는 충의(忠毅)라는 시호(諡號)가 추증(追贈)되었다. 충(忠)은 나라가 어지러울 때 나라를 잊지 않은 것이며, 의(毅)는 강하여 잘 결단하는 것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