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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1874
한자 朴宗挺
영어공식명칭 Park Jongjung
이칭/별칭 응선(應善),난계(蘭溪)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바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55년연표보기 - 박종정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76년 - 박종정 사마시 입격
활동 시기/일시 1592년 - 박종정 장원서별제 제수
몰년 시기/일시 1597년연표보기 - 박종정 사망
묘소|단소 분적산(紛積山) - 광주광역시 남구 노대동 지도보기
성격 문인
성별
본관 함양(咸陽)
대표 관직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

[정의]

조선시대에 전라도 광주 지역에 거주한 문인.

[가계]

박종정(朴宗挺)[1555~1597]의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응선(應善), 호는 난계(蘭溪)이다. 응천군(凝川君) 박신유(朴臣蕤)의 후손이고, 익찬(翊贊) 박수지(朴遂智)의 5세손이다. 아버지는 계공랑(啓功郞) 박인(朴訒), 어머니는 안중관(安重寬)의 딸 죽산안씨(竹山安氏)이다. 형은 박천정(朴天挺), 동생은 박시정(朴時挺)이다.

[활동 사항]

박종정은 1555년(명종 10)에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문예(文藝)가 일찍 이루어졌다. 1576년(선조 9)에 사마시에 입격하였다.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으로 생활의 법도로 삼았으며, 특히 산수를 좋아하여 지산(芝山) 아래에 정사(精舍)를 짓고 난계(蘭溪)라 자호(自號)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형 박천정과 함께 고경명(高敬命)[1533~1592]·김천일(金千鎰)[1537~1593]을 따라 양식을 모으고 의병을 규합하는 데 힘을 다하였다.

당시 전라감사 이광(李洸)이 의병을 막고 방해하여 정운룡(鄭雲龍)·유사경(柳思敬) 등과 함께 중앙에 소(疏)를 올려 비판하였는데, 이에 광주목사 권율(權慄)[1537~1599]을 전라감사로 대신하였다. 의병을 규합한 그의 행적에 1592년 조정에서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를 제수(除授)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선조 30)이 발생하자, 아버지를 모시고 월출산(月出山)으로 피했다가 왜적을 만나 죽임을 당했다. 사후 아버지의 몸을 감싸며 죽은 효행이 알려져 정려(旌閭를 받았다.

[학문과 저술]

박종정의 저술로는 후손인 박인순(朴麟淳)이 편집하여 간행한 『난계실기(蘭溪實記)』가 있다. 연세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묘소]

박종정의 묘소는 광주광역시 남구 노대동 분적산(紛積山)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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