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8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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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匡天 |
영어공식명칭 | Yoo Kwangcheon |
이칭/별칭 | 군필(君弼),귀락와(歸樂窩)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홍창우 |
[정의]
조선 후기 광주 지역 출신으로 헌납, 집의, 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
[가계]
유광천(柳匡天)[1732~1799]의 본관은 서산(瑞山)이며, 자는 군필(君弼), 호는 귀락와(歸樂窩)이다. 유수(柳洙)의 7대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유익서(柳益瑞), 할아버지는 유지채(柳之采), 아버지는 유휘소(柳輝韶), 어머니는 이숙빈(李淑馪)의 딸 함평이씨(咸平李氏)이다. 유광천의 부인은 김인후(金麟厚)의 6세손인 김기조(金基祖)의 딸 울산김씨(蔚山金氏)이며, 유광천은 김씨와의 사이에 유동식(柳東植), 유동환(柳東煥) 두 아들을 두었다.
[활동 사항]
유광천은 1732년(영조 8)에 광주 지역 오호리(五湖里)에서 태어났으며, 28살이 되는 1759년(영조 25)에 치러진 별시에서 병과 6위[전체 9위]로 과거에 급제하였다. 유광천은 정조가 즉위하면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였다. 1779년(정조 3) 장령(掌令)을 거쳐 경성판관(鏡城判官)에 제수된 것을 시작으로, 1786년에 헌납(獻納), 1792년에 사간(司諫), 1796년에 승지(承旨)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정조 때 여러 차례 상소를 올린 것이 『정조실록(正祖實錄)』과 『일성록(日省錄)』 등의 문헌 자료에 확인되는데, 특히 상업의 개편과 토지제의 개혁을 주장하는 등 당시로는 혁신적인 대안을 내놓았다.
1795년(정조 19)에는 정조의 명을 받아 금산에 있는 조헌(趙憲)의 사당인 칠백의총(七百義塚)에서 치제(致祭)를 하였는데, 그 치제문은 ‘조헌 관련 유품’에 포함되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유광천은 일찍이 벼슬길에 올라 삼사와 승정원 등에서 많은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스스로 ‘귀락와(歸樂窩)’라고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인생의 말년에는 치열하였던 관직 생활로부터 마음이 돌아온 것을 몸소 보여주었다. 1799년(정조 23)에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귀락와집(歸樂窩集)』은 유광천의 문집으로 일제강점기인 1935년 5세손 유영희(柳永禧)와 6세손 유병구(柳秉九), 유병희(柳秉熙) 등이 중심이 되어 간행하였다. 전체 16권 8책의 석판본으로, 유영희는 연보를 작성하였고, 유병구와 유병희가 발문을 썼다. 문집에는 서문이 실려 있지 않은데, 위백규의 문집인 『존재집(存齋集)』 권21에서 「귀락와서(歸樂窩序)」가 확인된다.
[묘소]
유광천의 묘소는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읍 오동촌의 언덕에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