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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1772
한자 盧自亨
영어공식명칭 No Jahyeong
이칭/별칭 도숙(道叔),긍재(肯齋)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홍창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414년연표보기 - 노자형 출생
활동 시기/일시 1450년 - 노자형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482년 - 노자형 성균관대사성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88년 - 노자형 첨지중추부사에 임명
몰년 시기/일시 1490년연표보기 - 노자형 사망
성격 문관
성별
본관 광주(光州)
대표 관직 성균관대사성|첨지중추부사

[정의]

조선 전기 광주 지역 출신으로 성균관대사성, 첨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가계]

노자형(盧自亨)[1414~1490]의 본관은 광주(光州)이고, 자는 도숙(道叔), 호는 긍재(肯齋)이다. 아버지는 광원군(光原君) 노의(盧義)이다.

[활동 사항]

노자형은 1450년(문종 즉위년) 37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뒤늦게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482년(성종 13)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다. 성균관에 있을 때 성종이, 노자형은 『주역』과 『논어』에 통달하였으며, 노자형보다 정숙한 사람이 없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을 정도로 학식이 뛰어났다. 노자형은 왼쪽 다리가 불편한 지병을 앓고 있어서 여러 차례 사직을 요청하였으나 뛰어난 학식과 청렴하고 겸손한 인품으로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는 일화가 『성종실록』에 자주 보인다. 1488년(성종 19)에는 첨지중추부사로 임명되었으나 임명장이 도달하기 전에 귀향을 하였으며, 노자형의 귀향 소식을 들은 성균관 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나라에서 노자형을 돌봐줄 것을 요청한 일도 있었다. 노자형의 졸기에 의하면 노자형은 벼슬자리에 크게 욕심이 없었고, 후학 양성에 힘썼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이를 영화롭게 여겼다고 한다.

[학문과 저술]

노자형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문인이다. 이언적은 조선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 역할을 한 인물로, 주희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확립하여 퇴계 이황에게 전하여 준 것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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