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761 |
---|---|
한자 | 車原頫 |
영어공식명칭 | Cha Wonboo |
이칭/별칭 | 사평(思平),운암(雲巖),문절(文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문다성 |
출생 시기/일시 | 1320년 - 차원부 출생 |
---|---|
추모 시기/일시 | 1692년 - 차원부 오천서원에 배향 |
추모 시기/일시 | 1804년 - 차원부 자암서원에 배향 |
추모 시기/일시 | 1806년 - 차원부 덕원서원에 배향 |
추모 시기/일시 | 1948년 - 차원부 대동사에 배향 |
사당|배향지 | 덕원서원 - 경상남도 합천군 성태길81[성태리 596-1] |
사당|배향지 | 자암서원 -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 통천리 |
사당|배향지 | 대동사 - 광주광역시 광산구 본량신촌동길 47-8[동호동 587] |
성격 | 문관|학자 |
성별 | 남 |
본관 | 연안 |
대표 관직 | 간의대부 |
[정의]
고려 후기에 간의대부를 지냈고 광주광역시 대동사에 배향된 문신이자 학자.
[가계]
차원부(車原頫)[1320~?]의 본관은 연안이며, 차효전(車孝全)의 19세손이다. 아버지는 지방어사(知防禦使) 차종로(車宗老)이고, 아들은 차안경(車安卿)이다.
[활동 사항]
차원부는 벼슬이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이르렀고, 정몽주(鄭夢周)·이색(李穡) 등과 교류하였으며, 학문과 그림으로 이름을 날렸다. 고려 말기에 관직에서 물러나 평산(平山)의 수운암동(水雲巖洞)에 은거하였다. 이성계(李成桂)가 요동(遼東)을 공격하게 되어 그 계략을 묻자 출병을 반대하였다. 뒤에 위화도회군으로 조선이 개국하였을 때 태조가 차원부를 공신으로 책봉하고자 하였으나 사양하고, 이어 정언(正言)·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등의 벼슬도 받지 않았다. 일찍이 정도전(鄭道傳)·하륜(河崙) 등이 차씨(車氏) 집안 외손의 서속(庶屬)이었음이 족보에 기재되어 있자, 이에 차원부가 평산으로 돌아가려고 송원(松原)에 이르렀을 때, 하륜 등이 보낸 자객에게 가족 및 일행과 함께 살해되었다. 차원부는 고려에 충성을 다한 두문동(杜門洞) 72인의 한 사람이다.
[상훈과 추모]
차원부는 조선 세종 때 황보인(皇甫仁)의 청원으로 신원되어 시중에 추증되고, 순천의 운암사(雲巖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1601년(선조 34)에 영남 사람 문경호가 올린 상소에 따르면 정종(定宗) 대에 차원부에게 사제(賜祭)한 일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1692년(숙종 18)에 오천서원(鷔川書院)이 건립되었다가 1806년(순조 6)에 옮겨 지어 덕원서원(德源書院)이라 하였다. 1868년에 철폐되었다가 1902년(고종 39)에 재건하였다. 차원부, 차포온(車蒲溫) 등을 배향하였다.
1727년(영조 3)에 유차달(柳車達)을 추모하기 위해 대동사(大東祠)가 건립되었는데 1868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1948년 현재의 위치에 재건되었다. 연안차씨(延安車氏), 문화유씨(文化柳氏) 인물인 차효전, 유공권(柳公權) 유효금(柳孝金), 차포온, 차원부, 유자미(柳自湄), 유헌(柳軒) 등을 배향하였다. 1804년(순조 4) 자암서원(紫巖書院)이 건립되었다가 1868년 훼철되었는데, 1919년에 재건되었다. 차원부와 차운혁(車云革)을 배향하였다.
세종 때 차원부의 명예 회복을 위한 『차원부설원기(車原頫雪寃記)』가 간행되었다. 박팽년(朴彭年)이 글을 짓고, 성삼문(成三問), 신숙주(申叔舟), 이석형(李石亨) 등이 주석을 달았으며, 당대 관료와 선비의 추모시 72수를 실었다. 그 후에도 이러한 종류의 여러 설원기와 설원록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