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7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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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續命 |
영어공식명칭 | Kim Sokmyeong |
이칭/별칭 | 충간(忠簡)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문다성 |
[정의]
고려 후기 광주 지역 출신으로 첨의평리, 평양도도순문사,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
[가계]
김속명(金續命)[?~1386]의 본관은 화평(化平)이며, 첨의중찬(僉議中贊) 김지숙(金之淑)의 손자이다.
[활동 사항]
김속명은 공민왕(恭愍王) 초에 감찰집의(監察執義)가 되어 감찰대부(監察大夫) 원의(元顗)와 감찰지평(監察持平) 홍원로(洪元老)와 함께 법을 집행하며 아부하지 않았다. 관직에 임명되는 자에게 허물이 있으면 서명을 거부하였으므로 내인(內人)과 환수(宦竪)들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여러 차례 자리를 옮기다 1355년(공민왕 4) 좌부대언(左副代言)이 되었다.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복주(福州)로 피난할 때 호종한 공으로 신축호종이등공신(辛丑扈從二等功臣)이 되었고, 감찰대부에 제수되었다가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올랐다.
1364년 서북면체복사(西北面體覆使)에서 다시 경상도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가 되어 진해현(鎭海縣)에 침입한 왜구 3,000여 명을 물리쳤다. 그 공으로 1365년 동서강도지휘사(東西江都指揮使)와 삼사좌사(三司左使)에 제수되고 단성규의보리공신(湍誠揆義輔理功臣)의 칭호를 받았으며,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었다.
1367년(공민왕 16) 평양도도순문사(平壤道都巡問使)를 거쳐 대사헌이 되었으나, 1374년(공민왕 23) 찬성사(贊成事) 최영(崔瑩)의 경상·전라·양광도도순문사의 보직 임명을 논박하다가 파면되었다. 그 후 우왕(禑王) 초에 삼사우사(三司右使)에 복직되었다.
김속명은 명덕태후(明德太后)의 외척으로서 궁중의 일을 전담하였고, 또 성품이 청렴하고 강직하여 거리낌없이 말함으로써 주위로부터 미움을 받기도 하였다. 때마침 반야(般若)의 사건이 일어나 이를 변론하는 자리에서 우왕에 대해 불경한 말을 하였다고 하여 이인임(李仁任) 등의 탄핵을 받아 처형될 뻔하였으나, 명덕태후의 구원으로 감형되어 1386년(우왕 12)에 문의현(文義縣)으로 귀양 가서 죽었다.
[상훈과 추모]
김속명의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공양왕(恭讓王) 초에 김속명에게 시호를 더해 주고 묘에 제사를 지냈으며, 자손을 등용함으로써 위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