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7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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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閻長 |
영어공식명칭 | Yeom Jang |
이칭/별칭 | 염장(閻丈),염문(閻文)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문다성 |
[정의]
고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무주별가(武州別駕)와 아간(阿干)[아찬(阿飡)]을 역임한 관인.
[개설]
염장(閻長)은 통일신라의 무주 사람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염장(閻長)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속일본후기(續日本後紀)』에는 염장(閻丈)·염문(閻文)으로 기록되어 있다. 김양의 휘하에서 무장으로 활동하였다.
[활동 사항]
838년(민애왕 1) 경주에서의 왕위 계승 분쟁에서 패배하여 청해진(淸海鎭)에 피신하였던 김우징(金祐徵)이 장보고(張保皐|張寶高)의 지원을 받아 김명(金明)[민애왕]에 맞서 군사를 일으켰을 때 염장은 김양(金陽)의 휘하로 이순행(李順行)·정년(鄭年) 등과 함께 5,000명의 군대를 통솔하여 출정하였다. 염장은 무주 철야현(武州鐵冶縣)에서 대감(大監) 김민주(金敏周)가 이끄는 중앙군을 격파하였다. 이어 달구벌(達句伐)에서 김흔(金昕)이 지휘하는 민애왕의 군대를 대파하고, 수도에 입성하여 김우징을 신무왕(神武王)으로 즉위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845년(문성왕 7) 3월 장보고의 딸을 문성왕의 두 번째 왕비로 들이는 문제를 둘러싸고 장보고 세력과 중앙정부의 대립이 거세어졌다. 이에 염장은 846년(문성왕 8) 중앙정부 측과 모의하여 거짓으로 장보고에 투신하였다. 장보고가 염장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여 주연을 베풀자 염장은 주연 석상에서 장보고를 암살하고 돌아갔다. 그 공으로 염장은 중앙정부로부터 아간(阿干)[아찬(阿飡)]의 관계를 받았다.
염장의 장보고 암살 시기에 대하여 『삼국사기』 권 11에서는 846년(문성왕 8) 봄이라고 하였으나, 『속일본후기』에서는 841년 11월 중이라고 하여 차이가 있다. 한편, 일본 승려 엔닌[圓仁]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 권 4, 회창(會昌) 6년 7월 9일조에는 장보고의 견당사매물사(遣唐買物使)로 활약하던 전청해진병마사(前淸海鎭兵馬使) 최훈(崔暈)이 나라의 어려움을 만나 초주(楚州) 연수현(漣水縣) 신라방에서 망명 생활을 한다는 기록이 있다. 『속일본후기』에 따르면, 장보고가 죽은 뒤, 장보고의 부장이었던 이창진(李昌珍) 등이 청해진을 근거로 계속 저항하였을 때 염장이 무진주렬하(武珍州列賀)[무주별가(武州別駕)의 오기로 추정]로서 다시 군대를 이끌고 가서 이를 평정하였다고 한다. 이후 염장의 동정에 관한 기록은 전해지는 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