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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족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1725
한자 豪族
영어공식명칭 A Powerful Family[Cla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문다성

[정의]

통일신라 말기와 고려 전기에 전라도 광주 지역에서 사회 변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지방 세력.

[활동 사항]

호족의 기원은 지방으로 낙향한 진골 귀족이나 6두품 계층, 주(州)·군(郡)의 이직자(吏職者)들, 그리고 촌의 행정을 담당한 촌주(村主)들이다. 대개는 대대로 그 지방에 토착하였던 촌주(村主) 계통의 지방 세력에서 나왔다. 구체적으로 유형을 나눠보면 ① 지방 호족(地方豪族)의 토대 위에서 신라(新羅) 조정(朝廷)에 반기를 든 자, ② 지방 호족의 기반을 가지기는 하였으나 내륙 지방의 호족과는 달리 대외 무역이나 노예 매매를 위주로 하던 해안 지역의 해상 세력(海商勢力), ③ 중앙 정부에 반기를 든 지방 군사 세력, ④ 초적·군도(草賊·群盜) 등의 무리를 도당화(徒黨化)한 것 등이다. 호족은 대토지 소유라는 경제력과 사병을 중심으로 한 무력을 갖추고 있었다.

호족은 통일신라 하대에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해 고려 왕조를 개창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고려 건국 후 호족들은 두 방향으로 나아갔는데, 중앙으로 진출해 문벌귀족이 되거나 지방의 향리(鄕吏)가 되었다. 결국 한국사에서 호족은 신라 말에 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권을 확보해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한 유력한 친족 집단이었다. 따라서 호족은 골품 체제로부터 벗어나려는 경향을 보였으며, 새로운 사회인 고려의 성립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리하여 신라의 골품 귀족이나 고려의 문벌귀족과 대비되는 정치적·사회적 세력 집단이라는 의미가 강했다.

광주광역시 및 그 일대의 호족으로는 완도(莞島) 청해진(淸海鎭)을 기반으로 한 장보고(張保皐|張寶高)[?~846], 비장(裨將)으로 광주(光州)와 서남해 지역을 기반으로 후백제(後百濟)를 건국한 견훤(甄萱)[867~936], 순천(順天)의 박영규(朴英規)[?~?], 순천과 여수에서 활동한 김총(金摠)[?~?]. 고려 혜종(惠宗)의 외가인 나주오씨(羅州吳氏) 가문의 오부돈(吳富伅)과 다린군(多憐君), 나주의 나총례(羅聰禮), 영암 출신의 최지몽(崔知夢)[907~987] 등이 있다.

[의의와 평가]

광주를 비롯한 서남해 일대의 호족들은 당시 중국과 인접한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문화와 경제력을 축적하면서 성장할 수 있었으며, 그 결과 통일신라 하대의 새로운 사회 변화와 후백제 및 고려 건국의 주역으로 발돋움하였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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