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7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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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咸平李氏 |
영어공식명칭 | Hampyeong Lee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광주광역시 광산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정호 |
본관 | 함평 - 광주광역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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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지 | 오치동 - 광주광역시 북구 오치동 |
성씨 시조 | 이언(李彦) |
입향 시조 | 이계인(李繼仁) |
[정의]
이언을 시조로 하고 이계인을 입향조로 하는 광주광역시의 세거 성씨.
[연원]
1924년 간행된 『광주읍지』에 보면 광주 고을에서 조선시대 두 번째로 과거에 급제한 인물을 배출한 성씨가 함평이씨 이극(李克)으로 나온다. 이는 그동안의 향토지들이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편집자들이 편향된 인물란을 구성했던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물론 이 같은 오류는 1792년의 『광산지』에서도 발견되기 시작한 것이지만 지나치게 명현의 고을임을 나타내려 한 나머지 광주에 살지 않는 타향 사람들을 인물란에 넣었을 뿐 아니라 본관이 광주라는 것만으로 이미 타향으로 떠나 몇 대를 산 인물을 포함하는 등 오류가 많다. 특히 특정 성씨의 인물 수록이 현저하게 많고 이미 뛰어난 행적을 남긴 인물도 후손이 미약하면 누락시킨 사례도 많다. 이 같은 오류와 편파성은 기존의 읍지를 고증이나 비판 없이 그대로 인용하는 관행과 편집 당시 세력이 성장한 가문을 수록한 사례는 광복 후 몇 차례 거듭된 광주시사에서도 발견하게 된다.
오늘날 그 자료가 대중화된 『문과방목(文科榜目)』 등을 광주읍지의 급제자 명단과 대조해 보면 조선 초기 광주 과거급제자의 반수 이상이 사실과 다르다. 1792년의 읍지에 처음으로 나온 조선조 1405년(태종 5)에 문과에 급제했다는 이극(李克)은 함평이씨이다. 이극은 광산이씨 이초(李椒)의 사위로 처가살이를 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본디 영광에서 살던 이계선(李繼先)의 아들이다. 오치동에 사는 함평이씨 파보에 보면 이극은 1433년(세종 5) 중국 사신으로 갔다 돌아오는 길에 압록강 첨수점에서 병사해 시신을 광주 각화동에 묻었다고 한다. 이극의 증손 이계인(李繼仁)이 용인 수세동에 살다가 증조부묘가 있는 각화동에 가까운 오치동에 자리잡아 함평이씨 광주 입촌조가 되었다고 정리하고 있다. 1570년 광주에 살던 함평이씨 이방주(李邦柱)가 문과에 급제한 기록이 나오지만 그 가계를 살필 수 없다.
[현황]
함평이씨는 고려 광종 때 사람 이언(李彦)을 시조로 받드는 본관 성씨로 광주광역시에만 1만 3718명이 살고 있는 큰 문중이다. 함평군 나산면, 나주시 다시면, 영광군 대마면 등에 집중해 살고 있으며, 전국의 25% 가량이 광주광역시, 함평군, 나주시, 영광군 등에서 살고 있다. 조선시대 공신을 4명이나 배출하고 문과급제자 77명, 광복 후 국회의원을 8명이나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