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427 |
---|---|
한자 | 西倉洞碑石群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광주광역시 서구 눌재로 261[서창동 434-2]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희태 |
건립 시기/일시 | 1769년 - 농선대시주비 건립 |
---|---|
건립 시기/일시 | 1925년 - 시혜불망비 건립 |
건립 시기/일시 | 1929년 - 시혜불망비 건립 |
현 소재지 | 광주광역시 서구 눌재로 261[서창동 434-2] |
성격 | 시주비|공덕비 |
양식 | 석비 |
관련 인물 | 박호련 |
재질 | 석재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농선대시주비- 비신 74㎝[높이]|42㎝[너비]|1925년 시혜불망비- 비신 87㎝[높이]|34㎝[너비]|22㎝[두께]|1929년 시혜불망비- 비신 86㎝[높이]|36㎝[너비]|12㎝[두께] |
[정의]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에 있는 3기의 비석.
[건립 경위]
서창동 비석군(西倉洞碑石群)은 농선대시주비(農船大施主碑) 1기와 시혜비(施惠碑) 2기로 이루어져 있다.
농선대시주비는 1769년(영조 45) 백성들이 쉽게 강을 건널 수 있도록 농선[농사용 선박]을 시주한 공덕을 기려 세운 비이다.
시혜비 2기는 서창나루[지금의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 뱃사공으로 굶주린 이웃들을 구제한 박호련(朴浩連)[1892~1946]의 시혜를 기리기 위해 서창면민이 1925년과 1929년에 세웠다.
[위치]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 서창치안센터 앞 길가에 있다.
[형태]
농선대시주비는 좌대와 비신이 한 돌이며, 비의 머리는 없는 형태이다. 시혜불망비는 좌대 없이 바닥에 비신이 세워져 있으며, 비의 머리는 한 돌로 꽃 문양을 잘 다듬어 꾸몄다.
[금석문]
농선대시주비는 앞면 가운데 '농선대시주비(農船大施主碑)', 오른쪽 '통정조창좌 장□□팔년 송학산□□(通政曹昌佐 張□□八年 松鶴山□□)', 왼쪽 한량강선주 □자향□□(閑良姜善周 □字香□□)', 옆면 '서일중삼량(徐日仲三兩)', 뒷면 '화주 금부촌리 김순봉 건륭삼십사년 을축(化主金夫村里 金順奉 乾隆三十四年 己丑)'이라 새겼다.
1925년에 세워진 시혜불망비는 앞면에 '박공호련시혜불망비(朴公浩連施惠不忘碑)'라 새겼고, 좌우 찬문(撰文)에 '절식절용 잉지구빈 은심방해 덕고어산(節食節用 剩知救貧 恩深防海 德高於山)'[아끼고 아껴서 남은 것이 있는 줄 알면, 가난을 구제해야 한다는 생각뿐이네. 깊고 깊은 은혜가 바다와 같고, 그 높은 덕은 산보다 높다네.], 뒷면은 '을축 이월 일 서창면 공립(乙丑 二月 日 西倉面 共立)'이다.
1929년에 세워진 시혜불망비는 앞면에 박호련시혜불망비(朴浩連施惠不忘碑), 찬문은 기사약기 전시휼빈 만구함송 유덕일신(飢思若已 傳施恤賓 萬口咸誦 遺德日新)'[남의 굶주림을 자기 일로 여겨, 여기저기 나눠주어 가난한 이 구제했네. 모든 사람들이 입 모아 칭송하니, 남기신 덕 날로 새로워라.], 뒷면은 '기사 십일월 일 서창면 일동(己巳 十一月 日 西倉面 一同)'이다.
[의의와 평가]
농선대시주비는 조선시대 전라도 나주 지역과 물길로 연결된 서창나루의 농선 운송의 역사를 알 수 있고, 박호련 시혜비 2기는 근대기 향촌 사회사를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