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2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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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栗里田舍 |
분야 | 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광주광역시 광산구 계안길 27-17[안청동 472]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현숙 |
건립 시기/일시 | 1910년 8월 - 율리전사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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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축|증축 시기/일시 | 1933년 - 율리전사 증축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62년 - 율리전사 개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9년 - 전라남도 향토문화연구자료 제29집 『석음유고』 발행 |
현 소재지 | 율리전사 - 광주광역시 광산구 계안길 27-17[안청동 472] |
성격 | 전통 가옥 |
양식 | 기와집 |
정면 칸수 | 5칸 |
측면 칸수 | 2칸 |
소유자 | 박길원 |
관리자 | 박길원 |
[정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안청동에 있는 박노술이 세운 전통 가옥.
[개설]
박노술(朴魯述)의 호는 석음(石陰)이며,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 이후 기우만(奇宇萬)이 일으킨 의병부대에 참여하였으나,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전라남도 광주군 흑석면[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안청동] 계안마을에 율리전사(栗里田舍)를 세워 후학 양성에 매진하였다. 계안마을에는 유림 제자 700명으로 구성된 문생계(門生契) 가 있었을 정도로 박노술은 유림계를 이끌었지만, 일제가 내린 은사금칙첩(恩賜金勅帖)을 여러 차례 거절하면서 고초를 겪다 절명하였다.
[위치]
광주광역시 광산구 안청동 계안마을 입구에서 직선으로 들어가 막바지 왼쪽에 정남향에 있는 기와집이다.
[변천]
1933년 박노술의 아들 박일규가 초가로 증축하였으며, 1962년 군비 지원으로 개축하였다.
[형태]
정남향에 정면 5칸, 측면 2칸의 기와집으로 동편에 넓은 대청마루가 놓여 있고, 서편에 4칸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면에 동서로 이어진 긴 툇마루가 놓여져 있으며, 크고 작은 편액(扁額)과 주련(柱聯)이 걸려 있다. 건물 중앙에 김태규(金泰奎)의 '율리전사', '석음유장(石陰遺庄)'이라고 쓴 대서(大書) 편액이 걸려 있고, 박노술이 쓴 '팔절주련판각(八絶柱聯板刻)'도 각 문지방과 들보 위, 기둥에 걸려 있다. 판각 현판들은 박노술의 셋째 손자 박종삼(朴種參)이 손수 판각하여 전하고 있다.
[현황]
율리전사 뒤에 안채가 있어 후손들이 기거하며 애써 관리하고 있으며, 박노술의 뜻이 담긴 풍천대(風泉臺)는 하남일반산업단지 안청공원 내에 복원되어 있으나, 계안마을에는 그 흔적을 남기지 않아 아쉬운 면이 있다.
[의의와 평가]
박노술은 "조선의 삼천리를 뜻하는 삼층석탑을 마을 앞산 비룡대에 세워 주기를 바란다."는 유지를 남겨 아들 박일규와 친지들이 뜻을 모아 1920년 10월 풍천대를 석축하였고, 율리전사와 더불어 석음의 흔적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