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0907 |
---|---|
한자 | 完制時調唱 |
이칭/별칭 | 광나제시조창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문화유산/무형 유산 |
유형 | 작품/민요와 무가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옥희 |
[정의]
광주광역시에서 전승되고 있는 국악 성악곡인 시조창.
[개설]
완제시조창은 1995년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되었으며, 이상술[1927~2007]이 예능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시조창은 지역마다 특징이 있어 서울특별시와 경기도는 경제, 충청남북도는 내포제, 경상남북도는 영제, 전라남북도는 완제가 전승되고 있다.
[채록/수집 상황]
1995년 광주광역시에서 발간한 『문화재조사보고서』에 완제시조창 관련 내용이 채록되었다.
[구성 및 형식]
완제시조창은 평시조와 사설시조가 대부분이지만, 엇시조와 반사설시조 등 명확하게 구분이 어려운 시조들도 있다. 악기 없이 장구나 무릎장단으로 일시적 연주를 하기 때문에 초장과 중장 끝 장단에서 5박자가 줄어들기도 한다. 음계는 슬프고 처절한 느낌을 주는 3음의 계면조와 맑고 씩씩한 느낌을 주는 5음의 우조로 되어 있으며, 연결성이 발달하여 소리가 윤택한 것이 특징이다.
[내용]
시조는 가곡, 가사와 더불어 정악으로 불리는데, 민중들 사이에서보다는 상류층들이 즐기면서 조선 후기에 화려한 전성기를 이룬 가창 문화였다. 일제강점기 때도 전라남도 광주와 나주에는 시조창이 활발하였다. 광주의 박남규와 나주의 박희성 소리는 광나제라고 따로 부를 정도로 유명하였다.
박남규와 박희성의 소리는 이상술에게로 이어졌다. 나주의 박희성은 이상술이 19세 되던 1945년에 “해방도 되고 했으니 우리 것을 찾고 지키자.”라며 시조를 배울 것을 권유하였다. 이상술은 21세부터는 광주의 박남규에게도 배웠으며, 28세 때에 광주국악원의 안치선을 찾아가 시조창과 단소를 사사하였다. 34세에는 유종구에게 시조를 다듬었으며, 37세에는 정경태에게 재학습하였다. 국가무형문화재 제41호 가사 예능 보유자였던 정경태는 이상술의 시조창을 듣고 정통 완제라 하며 채보(採譜)[곡조를 듣고 그것을 악보로 만듦]를 하여 전국에 알렸으며, 현재까지 완제의 전형으로 통하고 있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이상술은 시조 외에도 단소, 소리북 등에 능하고 풍부한 성량을 지니고 있어 변화무쌍한 장단을 자유롭게 구사하였다. 정경태와 함께 대한시우회를 발족하여 시조창 보급과 지도에 힘쓰면서 꾸준히 명맥을 유지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상술의 좌우명은 ‘철두철미, 완전무결’이었다. 시조창을 배우는 초심자들에게 “시조는 우리 민족의 정기가 서려 있는 보배 같은 유산이므로 시조창을 부를 때는 정좌를 하고, 음보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음보에 맞추어 발음을 정확하게 하며, 의미를 마음으로 느끼고 정확하게 전달해야 한다.”라는 점을 항상 강조하였다.
[현황]
1995년 이상술이 완제시조창 예능 보유자로 인정되었으나, 2007년 사망 후 종목만 유지되고 있다. 이상술의 막내딸이자 전수 조교인 이미화가 ‘소정 정가회’를 통하여 맥을 이어 가고 있으며, 이상술의 제자들에 의해서도 완제시조창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공주 백제문화제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심성자와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에서 장원을 한 문정순, 서울 국창부 장원 고광열, 정창섭, 김공수, 정용우를 비롯하여 현 광주전남지부장을 맡고 있는 이미화와 사범 김순경, 인원지회장과 근촌선양회를 조직 운영하고 있는 추창규 회장과 전국의 시조경창대회 심사위원 및 지회장 80~90%가 이상술의 제자들이다.
[의의와 평가]
완제시조창은 오랜 세월 사람들이 즐겨 부르던 우리나라 고유의 대중음악이라 할 수 있으며, 전라도 사람들 특유의 기백이 묻어나는 귀중한 무형문화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