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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학련 사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0849
한자 民靑學聯事件
이칭/별칭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연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74년 4월 3일연표보기 - 민청학련 사건 발생
종결 시기/일시 1975년 2월 15일연표보기 - 민청학련 사건 종결
발단 시기/일시 1974년 1월 - 긴급조치 1, 2호 발표
전개 시기/일시 1974년 1월 말 - 전남대학교 김정길·이강, 서울대학교 이철· 나병식 전국 단위의 유신 반대 시위 계획
전개 시기/일시 1974년 2월 - 서울대학교, 경북대학교, 전남대학교 3개 대학 정기적인 연락로 결정
전개 시기/일시 1974년 3월 - 전남대학교 윤한봉 서울대학교 황인성 등과 만나 전국적 연대를 통한 반유신 운동 가능성 논의, 전라남도 지역 대학들의 연계 시도
전개 시기/일시 1974년 3월 말 - 4월 3일을 전국 단위 시위의 시작일로 할 것과 시위를 주도할 단체명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으로 할 것 등을 결정
전개 시기/일시 1974년 4월 3일 - 서울대학교·연세대학교·성균관대학교·이화여자대학교 시위 시작, 긴급조치 4호 선포
전개 시기/일시 1974년 4월 9일 - 전남대학교 유인물 배포 및 학생 동원 지각, 경찰에 의해 관련자들 체포
발생|시작 장소 전남대학교 - 광주광역시 북구 용봉로 77[용봉로 300]지도보기

[정의]

1974년 4월 박정희 정권이 전남대학교 김상윤, 윤한봉 등을 포함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관련자들을 국가 전복 혐의로 왜곡·날조하고 구속·기소하였던 공안 사건.

[역사적 배경]

박정희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은 1972년 전남대학교 『함성』지·『고발』지 사건, 1973년 남산 부활절 예배 사건, 1973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시위 등을 거치면서 전국 대학가와 지식인, 종교인, 재야인사 등으로 점차 확산되었다. 1973년 말에는 유신헌법에 대한 개헌 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이 시작되어 10일 만에 서명자가 30만 명을 돌파하는 성과를 이루기도 하였다. 유신 철폐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박정희 정권은 1974년 1월 긴급조치 1, 2호를 발표하고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하는 모든 행위를 엄금하였다.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긴급조치 선포 이틀 후, 대학가를 중심으로 전국 시위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위한 첫 모임이 열렸다. 이들은 서울대학교 내부의 문리과대학·법과대학·상과대학 중심에서, 서울대학교·고려대학교·연세대학교로, 그 다음에는 서울권·영남권·호남권으로 확대시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전국 단위의 시위를 계획하였다.

한편, 전남대학교에서는 1973년 말 법학과 김세곤, 이철환 등이 시국성토대회를 준비하다가 연행되었고, 문리과대학 전영천 등의 주도 아래 교내 시위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이후 전남대학교 학생운동은 윤한봉, 김상윤, 윤강옥 등을 중심으로 투쟁을 준비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73년 말부터 1974년 초 사이에 서울의 전국 단위 시위 계획 그룹과 전남대학교 학생운동 그룹 간 연계가 성사되었다.

[경과]

1974년 1월 말, 전남대학교 김정길·이강, 서울대학교 이철·나병식은 광주가톨릭센터에서 전국 단위의 유신 반대 시위를 계획하기 위해 만남을 가졌다. 2월에는 서울대학교, 경북대학교, 전남대학교 3개 대학 연락 대표들이 정기적으로 연락하기로 결정하였다. 3월에는 전남대학교 윤한봉이 서울대학교 황인성 등과 만나 전국적 연대를 통한 반유신 운동의 가능성에 대해 논의를 진행했으며, 이후 전라남도 지역 대학들의 연계를 시도하였다. 이에 전남대학교 윤한봉, 김상윤, 심재삼 등과 조선대학교 안상선 등이 함께하였다. 또한 광주 지역 시위 준비로 선언문 작성 및 유인물 제작 등을 해나갔다.

1974년 3월 말, 4월 3일을 전국 단위 시위의 시작일로 할 것과 시위를 주도할 단체명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으로 할 것 등이 결정되었다. 4월 3일, 서울대학교·연세대학교·성균관대학교·이화여자대학교에서 시위가 시작되었으나, 당일 오후 긴급조치 4호가 선포되면서 광범위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전남대학교는 4월 9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당일 아침, 유인물 등을 뿌리며 학생 동원에 들어갔으나, 정보를 알고 있던 경찰에 의해 관련자들이 모두 체포되었다.

[결과]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기소된 전남대학교 학생들은 윤한봉, 이강, 김정길, 김상윤, 최철, 박형선, 문덕희, 윤강옥, 하태수, 이학영, 이훈우, 정환춘, 유선규, 박진, 성찬성, 전영천, 이현택, 김윤봉 등 총 18명이다. 이 가운데 이현택, 김윤봉을 제외한 대부분은 징역 7년에서 15년형을 선고받았다가 1975년 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민청학련 사건 이후 각 대학에 '상담지도관실'이 설치되고, 대학 내 분담지도교수제가 실시되는 등 대학생에 대한 정부 당국의 감시가 강화되었다.

[의의와 평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전국적으로 1024명이 조사를 받고 그 중 250여 명이 군법회의에 송치되면서 감옥과 법정까지 시위의 장소가 되었다. 또한, 민청학련 사건을 계기로 전국 학생들 간의 연계뿐만 아니라 지식인, 종교인, 혁신계 인사, 재야 인사 등 반유신을 위한 광범위한 연대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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