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08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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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1946年秋收蜂起 |
영어공식명칭 | 1946 Uprising of Harvest |
이칭/별칭 | 10월 인민항쟁,1946년 10월항쟁,1946년 11월 봉기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연숙 |
[정의]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서 1946년 미군정의 미곡 정책 실패에 대한 비판과 시정 요구를 위해 발생한 봉기.
[역사적 배경]
1946년 광복 직후의 혼란한 정세 속에서 미군정의 강제적인 양곡 공출, 미곡 정책의 실패 등으로 인해 식량난이 계속되자, 대구·경상북도 지역을 중심으로 추수봉기가 발생하였다. 이는 노동자 중심의 9월 총파업, 농민 중심의 10월 인민항쟁으로 이어지는데, 1946년 9~12월에 걸쳐 38도선 이남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서는 인민위원회 세력이 대부분 분쇄된 상태에서 농민·노동자 등의 일부 군중이 모여 10~11월 사이에 소규모 시위가 발생하였다.
[경과]
1946년 10월 4일, 이남래를 중심으로 한 8개 공장 대표들은 당시 38도선 이남 전역에서 발생하고 있던 총파업을 광주에서도 이어가기 위해 비밀리에 '공장 파업 협의체'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식량 배급 증가, 임금 인상, 해고 거부, 공장 의복 지급, 우익분자 추방, 월급제 요구 등을 결의하고 10월 7일 총파업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10월 7일 전에 이남래 외 다른 간부들이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에 10월 7일 가네보[鐘紡]면화공장에서 일부 노동자들이 파업을 시작하였지만 호응을 얻지 못해 무위로 돌아갔다.
10월 30일에는 한국여성조합, 광주노동조합원 등이 참가한 식량 시위가 발생하였으며, 이에 참가하기 위해 화순에서 2000~3000명의 파업 노동자들이 광주로 행진하였다. 이들은 미군정 및 전라남도청 대표자들과 조정을 시도하였으나 성과를 얻지 못했다.
11월 3일에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을 기념하여 광주사범학교, 광주서중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400여 명이 모여 시위를 진행하였다. 이날 서창리, 화정리, 칠석리, 송정리 등에서 면사무소와 경찰서가 습격당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다음날인 11월 4일에도 200여 명의 군중이 광주부 내 남가동(南佳洞) 파출소를 습격하는 등 소규모의 시위가 이어졌다.
[결과]
1946년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서 일어난 추수봉기는 경찰과 미군에 의해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진압되었다. 진압 과정에서 봉기를 주도한 이들이 다수 검거되어 이후 운동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으며, 좌익 및 노동자·농민의 공개적인 활동은 위축되었다.
[의의와 평가]
광주를 비롯한 전라남도의 1946년 11월 봉기는 미군정의 인민위원회 및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 식량 정책의 실패 등에 대한 항의와 경찰에의 항거를 목적으로 하였다. 이 과정에서 지주나 우익 세력을 공격한 일은 거의 없었다. 이는 11월 봉기가 미군정과 대리인 역할을 했던 경찰에 대한 민중의 항쟁이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