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07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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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神社參拜反對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최일례 |
[정의]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광주에 있었던 수피아여학교를 중심으로 벌어진 신사참배 반대 운동.
[역사적 배경]
일제는 1910년대 관공립학교, 1920년대 초반부터는 사립학교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1925년 조선신궁(朝鮮神宮) 진좌제(鎭座祭) 의식 이후 언론과 기독교계 사립학교가 반발하자 사립학교 학생들의 신사참배 정책은 일단 보류하였다. 그러다 1930년대 들어 일제는 대륙 침략을 재개하면서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사상적인 통일을 도모하고자 기독교계 사립학교에 다시금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당시 기독교계는 신앙상의 이유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조선총독부의 양해를 구하였다. 하지만 1935년 평양 기독교계 사립학교장의 신사참배 거부 사건을 계기로, 일제는 신사에 참배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폐교하라고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일제는 신사참배를 종교의식이 아닌 국가의식, 국민의례라고 주장하여 왔다. 일제의 주장처럼 신사참배가 국민의례라면 국민으로서 불가피한 일이며 신앙적 양심에 구애될 것이 없다는 것이 일부 교회 지도자들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대다수 교회 지도자들과 신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신사는 '신도(神道)'라는 일본 고유의 종교에 근거하였고, 신사참배는 기독교가 엄금하고 있는 우상 숭배라는 점에서 반대하였다.
이렇듯 신사참배에 대해 기독교계의 의견이 분열되어 1937년부터 기독교계 학교의 일부는 순응하고 일부는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폐교되었다. 1938년 제27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는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니고 국민의식이므로 신사참배를 행하기로 결정하였다. 1938년 전라남도와 광주 지역에서도 80여 개 교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였다.
[경과]
1937년 9월 6일 일제는 일본군이 중국에서 승리하도록 기원하기 위해 교사와 학생들을 신사에 나오도록 명령하였다. 이후 신사에 참배하지 않은 학교에 폐교 조치를 내렸는데, 호남 지방에서 4개교가 폐교 조치를 받았다. 전라남도 광주 수피아여학교와 숭일학교, 전라남도 목포의 영흥학교와 정명학교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 외에 순천의 매산학교, 전주의 신흥학교와 기전학교는 자진 폐교 청원을 내고 문을 닫았으며 군산의 영명학교 역시 폐교되었다.
[결과]
전국적인 신사참배 거부를 통해 투옥된 사람은 2000여 명에 이르고 200여 교회가 폐쇄되었으며 순교자는 5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전라남도 광주 지역은 신사참배 거부로 인해 수피아여학교와 숭일학교가 폐교되었다. 두 학교의 폐쇄 이후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고초를 겪은 기독교인들이 광주 지역에 다수 있었으며, 광주 지역에 남아 있던 외국인 선교사들은 일제 경찰에 의해 강제 추방되었다. 그 외에 호남 지방 10개 중등학교에 등록되어 있던 4787명의 학생들은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의의와 평가]
신사참배 반대 운동은 종교적인 측면에서 기독교 신앙을 지키려고 하였다. 민족사적 측면에서는 황국신민화 정책을 통한 민족 말살 정책에 대한 저항적 성격을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