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07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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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1747年鄕案破棄事件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광주광역시 남구 중앙로107번길 5[구동 22-3]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수경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747년 - 1747년 향안파기 사건 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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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 장소 | 광주향교 - 광주광역시 남구 중앙로107번길 5[구동 22-3] |
종결 장소 | 광주향교 - 광주광역시 남구 중앙로107번길 5[구동 22-3] |
[정의]
1747년 광주향교(光州鄕校)의 향안이 파기된 사건.
[역사적 배경]
전라도 광주는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이후에도 오랫동안 기존의 사족들이 향권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얼마 후 신향 세력의 도전으로 광주의 향촌 사회에도 커다란 동요를 불러일으켰다.
[경과]
향안(鄕案)이란 고려 시대부터 현재까지 광주의 유명한 인물과 유학자의 이름을 차례로 기록한 문서로, 1747년(영조 23) 향안이 파기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실상에 대해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전라도 광주에서 감영(監營)이나 중앙에 보고한 문서를 모은 『보첩고(報牒攷)』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향안은 향청의 높은 벽장 속에 깊이 보관되어 평상시에는 향안의 보관함을 열고 닫을 수 없다. 1747년(영조 23)에 향안의 신안(新案)이 편성되었는데, 그때 소란이 크게 일어나 신안이 혁파되어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다만 구안이 2건 남아 있는데, 구안은 70여 년 전에 작성된 것이다." 사족 중심의 향촌 지배체제가 18세기에 이르러 이처럼 동요되자 사족들은 지배권을 다시 확립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안을 강구하였는데 이러한 노력으로 향교의 기능을 더욱 강화하였다.
[의의와 평가]
1747년 향안파기 사건으로 전라도 광주 사회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신·구향 사이에 세력다툼이 심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점과 조선 후기 전라도 광주 향청의 변화를 알 수 있다는 데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