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07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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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石器時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선사/석기 |
집필자 | 노성태 |
[정의]
광주광역시에서 돌을 이용하여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던 시대.
[개설]
광주 지역에서는 광주광역시 서구 치평동과 매월동, 광산구 산월동에서 후기 구석기인들의 흔적과 남구 노대동에서는 신석기인들이 남긴 빗살무늬 조각 등이 발견되었다. 이를 통해 광주 지역이 구석기·신석기인들의 삶의 터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구석기시대와 광주]
인류가 언제 출현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가설이 있지만, 대체로 300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출현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인류가 출현하면서 자연과 적응하는 과정에서 석기를 사용하는 최초의 문화를 이룩하게 되는데, 이를 구석기시대라고 한다. 구석기시대는 석기의 제작 기술에 따라 전기[약 300만 년 전~12만 5000년 전], 중기[12만 5000년 전~4만 년 전], 후기[4만 년 전~1만 년 전]으로 나뉜다.
광주 지역에서 언제부터 구석기인들이 살았는지를 알려 주는 대표적인 유적은 순천 죽내리, 화순 도산 유적이다. 순천의 죽내리 유적에서는 하층의 문화층에서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 유적에서 볼 수 있는 석영과 응회암으로 제작된 대형격지, 주먹도끼, 찌르개, 찍개, 긁개 등 많은 양의 중기 구석기시대의 석기가 확인되었다. 화순 도산 유적에서는 석기 제작터와 함께 찍개, 여러 면 석기, 긁개, 홈날 석기, 톱니날 석기 등이 출토되었다.
중기 구석기시대에 광주 지역에 들어온 인류는 광주광역시에서는 뚜렷한 생활 흔적을 남기지는 못하였다. 다만, 광주광역시 서구 치평동과 매월동, 광산구 산월동 등에서 후기 구석기인들의 흔적만이 일부 조사되었을 뿐이다. 광주 지역 최초의 인간 흔적이 남아 있는 광주광역시 서구 치평동 유적은 1996년 조선대학교 박물관의 발굴 조사 결과 9개의 지질층과 그 지질층에서 2개의 구석기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구석기 1문화층에서는 몸돌 1점, 조각돌로 만든 긁개 2점, 구석기 2문화층에서는 몸돌 2점, 격지, 찍개, 여러 면 석기, 조각돌이 각각 1점 등 지표에서 채집된 유물을 포함하여 총 12점이 발견되었다.
2개의 문화층 중 구석기 2문화층은 후기 구석기의 말기에 해당하고, 구석기 1문화층은 이보다 이른 시기로 추정된다. 구석기 1문화층의 연대는 구석기 2문화층에 이르기까지 쌓인 약 3m에 이르는 퇴적 두께와 그 사이에 적갈색 모래질 찰흙층이 있는 점을 고려한다면, 적어도 중기 구석기시대에 속할 가능성도 있다.
광주광역시 서구 치평동 구석기 유적은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된 최초의 구석기 유적이라는 점, 1문화층이 중기 구석기 단계의 것일 가능성이 함축되어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신석기시대와 광주]
약 1만 년 전 빙하기가 끝나면서 우리나라의 기후와 지형은 현재와 비슷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 무렵 구석기시대가 끝나고 신석기시대가 전개되었다. 따뜻해진 기후를 배경 삼아 인간은 채집과 사냥에서 벗어나 농경이라는 새로운 식량 획득 방식을 발명하면서 다방면에 걸친 사회·문화적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농경의 시작과 함께 신석기 문화를 특징짓는 가장 큰 진전은 토기의 제작이었다. 토기는 흙과 불을 이용한 인간의 발명품으로 바탕흙의 선정, 반죽, 형태 만들기, 다듬기, 무늬 새기기, 말리기, 굽기 등 일련의 과정이 수반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토기는 노천에서 700~850℃ 온도로 구워진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토기가 출토된 곳은 제주 고산리 유적이다. 고산리 토기는 외면에 무늬가 없는 갈색의 토기로, 바탕흙에 식물을 섞어 만들었다. 고산리 토기 다음으로 덧무늬 토기[융기문토기(隆起文土器)], 누른무늬 토기[압문토기(押文土器)], 빗살무늬 토기[즐문토기(櫛文土器)] 등이 출현하였다. 이 중 우리나라 전역에서 출토되는 대표적인 토기가 빗살무늬 토기이다.
광주 지역에서 발굴 조사된 최초의 신석기시대 유적은 신석기시대 후반기의 노대동 유적이다. 노대동 돌무지 집터[적석유구(積石遺構)]와 구덩이 모양의 집터[수혈유구(竪穴遺構)]에서는 아가리 부분이 두 겹으로 이루어진 이중구연(二重口緣)을 공통으로 하면서 연속된 점무늬, 짧은 빗살무늬, 마름모 무늬 등이 새겨진 토기 조각과 소량의 석기가 출토되었다. 노대동 유적은 신석기 유적이 여수, 신안 등 주로 섬이나 해안가의 패총 유적에서 발견된 것과는 달리 영산강 유역의 내륙에서 확인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