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20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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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平里大平院水殺祭 |
분야 |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
유형 | 의례/제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대평리 |
집필자 | 임승범 |
의례 장소 | 장승 터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대평리 대평원 마을 어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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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민간 의례|동제 |
의례 시기/일시 | 정월 열나흗날[음력 1월 14일] |
[정의]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대평리에서 매년 음력 정월 열나흗날에 마을의 평안을 위해서 마을 어귀에 있었던 장승과 솟대에 지냈던 제의
[개설]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대평리의 대평원 마을 어귀에는 남녀 장승 두 기와 솟대가 서 있었다. 장승은 수살이라고 부르고 솟대는 수살대 또는 오릿대라고 불렀다. 대평원 마을에서는 해마다 정월 열나흗날 저녁에 이 장승과 솟대에 제사를 지냈으나 새마을 운동의 여파 등으로 말미암아 제의가 중단되었다.
[신당/신체의 형태]
대평원 마을 입구에는 장승 두 기와 솟대 두 기가 서 있었다. 마을 노인들의 증언으로는 장승은 수백 보 가량 거리를 두고 마주 보았는데 여장승은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었고, 남장승은 동쪽 시냇가 옷샘 부근에 있었다. 솟대는 장승 옆에 각 한 기씩 서 있었다. 남장승은 머리에 관을 쓰고 있었으며 몸통에 천하 대장군(天下大將軍)이라고 쓰여 있었으며, 여장승에는 지하 대장군(地下大將軍)이라고 쓰여 있었다. 솟대는 장대 위에 오리를 깎아서 꽂아 두었으며 한지로 작은 깃발을 만들어서 꼬리 부분에 묶어두었다.
1960년대에 마을에 큰길이 나고 나서 두 장승을 도로변 앞으로 옮겨서 제를 지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제가 소멸되고 장승과 솟대도 더는 세우지 않게 되었다.
[절차]
1970년대에 중단된 대평리 대평원 수살제의 절차에 대하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대평원 마을 주민들은 정월 초가 되면 마을 회의를 열고 정결한 노인 중에서 제관(祭官)을 선출한다. 제관은 주당이라고도 불린다. 주당이 되려면 그해 일진을 보아 길일인 생기복덕일(生氣福德日)이 닿아야 하며 부정이 없어야 한다. 주당으로 선출이 되면 제의 일주일 전부터 집 앞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펴 놓아서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금한다. 또한 매일 목욕재계하고 외출을 삼간다.
제사 비용은 여럿이 패를 짜서 곳곳을 돌아다니며 재주를 부려서 마을에 필요한 경비를 구하는 걸립(乞粒)을 통하여 충당했으며 제물로는 돼지머리, 팥시루떡, 삼색과실, 포, 술 등을 장만한다.
정월 열나흗날이 되면 주민들이 풍물을 치며 산으로 가서 장승목과 솟대목을 베어서 주당의 집으로 온다. 주당의 집 마당에서 마을 주민들이 술과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장승과 솟대를 깎는다. 수살제는 한밤에 치러진다. 주민들이 풍물을 치고 장승 주위로 모이면 주당 내외가 제물을 차리고 제를 지낸다. 제의가 끝날 무렵에는 집마다 부정을 없애고 소원을 빌려고 흰 종이를 사르는 소지(燒紙)를 올려 주어서 마을과 가정의 화평을 기원한다.
[부대 행사]
수살제가 끝나면 마을 주민들로 구성된 풍물패가 가락을 치며 동네를 한 바퀴 돈다. 이튿날이 되면 제의에 올렸던 떡을 비롯한 제물을 집집이 나누어서 음복을 한다. 한편, 마을에서 북쪽으로 난 길에는 서낭당이 있었다. 마을의 부녀자들은 정월 열나흗날이 되면 가정이 평안하고 병 없이 횡액을 면하기를 빌고자 서낭에 가서 고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서낭도 새마을 운동 때 소실되었다.
[현황]
대평리 대평원 마을에서는 새마을 사업 이후로 중단된 수살제를 더는 지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