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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4018
한자 成石璘
이칭/별칭 독곡(獨谷),문경(文景)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시대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황서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338년연표보기 - 성석린 출생
활동 시기/일시 1403년 - 성석린 우의정 부임
활동 시기/일시 1407년 - 성석린 좌의정 부임
활동 시기/일시 1415년 - 성석린 영의정 부임
몰년 시기/일시 1423년 1월 12일연표보기 - 성석린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82년 4월연표보기 - 성석린 선생 묘 포천시 향토 유적 제22호로 지정
유배|이배지 성석린 유배배 - 경상남도 함안
묘소|단소 성석린 묘소 -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고일리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창녕(昌寧)
대표 관직 영의정

[정의]

조선 전기에 직산에 관한 시를 남긴 문신.

[개설]

성석린(成石璘)[1338~1423]은 19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국자학유(國子學諭)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라 전리총랑(典理摠郞), 밀직대언지신사(密直代言知申事), 동지사사(同知司事), 정당문학(正堂文學) 등 요직을 거치고 영의정에 올랐다. 시문에 능하고 명필로도 명성 높은 관료였다.

[가계]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자(字)는 자수(自修), 호는 독곡(獨谷),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전객부령(典客副令)을 지낸 성공필(成公弼)이 증조할아버지고, 판도총랑(版圖摠郞)을 지낸 성군미(成君美)는 할아버지다. 아버지는 성여완(成汝完)이다.

[활동 사항]

성석린은 135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19세에 국자학유(國子學諭)가 되고, 공민왕 때는 지신사(知申事)로 발탁되었다. 1380년에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있을 때 왜구가 승천부에 침략하자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양백연(楊伯淵)과 함께 참전하여 크게 공을 세워 공신록에 올라 창원군(昌原君)에 봉해졌다.

성석린은 양광도(楊光道)[현재의 충청도]의 관찰사로 있을 때 큰 가뭄으로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기근에 허덕이자 각 고을마다 의창(義倉)[농민 구제를 위해 각 지방에 설치한 창고] 제도를 만들어 빈민을 구제했다. 조선이 개국하자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가 되어 한성판사에 올랐다. 정종 때에는 서북면 도순찰사, 평양부윤, 문하정승, 좌정승을 역임하고 1401년(태종 1)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창녕부원군에 봉해졌다. 1403년에 우의정, 1407년에 좌의정, 1415년에 영의정을 지냈다.

성석린은 양광도 관찰사로 있을 때 고을 순찰차 직산에 왔다가 다음과 같은 시를 써서 백성들을 위로 하였다.

직산수십실(稷山雖十室)/역족시오인(亦足試吾仁)/무자선경독(撫字先煢獨)/차과문부빈(差科門富貧)/할계언시희(割鷄言是戱)/유독사감준(留犢事㻣遵)/유학종하용(幼學從何用)/수영택급급(須令澤及及)

직산이 비록 작은 고을이지만/나의 인(仁)을 시험하기에는 넉넉하네/불쌍하고 외로운 사람을 먼저 어루만져 돌보고/ 빈부를 물어서 세금을 물리네/소잡는 칼로 닭을 잡는다는 말은 희롱일 뿐/송아지를 남겨놓은 일은 능히 준수할 수 있네/어릴 때부터 익힌 학문을 어디에다 쓰리오!/모름지기 좋은 혜택이 백성에게 미치도록 하려네.

[묘소]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고일리에 부인 화숙택주(和肅宅主) 순흥 안씨(順興 安氏)의 묘와 합장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1402년 재상으로 궤장을 하사[상신사궤장(相臣賜几杖)] 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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