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11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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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申錫九 |
이칭/별칭 | 은재(殷哉)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박성섭 |
[정의]
일제 강점기 천안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평산(平山), 호는 은재(殷哉)이다. 신재기(申在綺)의 아들이다.
[활동 사항]
신석구(申錫九)[1875~1950]는 충청북도 청주 출신으로,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구국의 방도로서 기독교 감리교에 입교하여 1908년 33세 때 개성 남부감리교회에서 미국 선교사 왕영덕(王永德)의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다. 서울 서대문 밖의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에서 3년간 수학하고 감리교목사가 되었고, 서울·개성·춘천·원산·남포 등지에서 목회하였다.
3·1 운동 때는 손병희(孫秉熙) 등과 함께 민족 대표로 참석하여 서울 인사동의 태화관에서 「독립 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 삼창을 한 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20년 경성 복심 법원에서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계속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춘천·원산 등지에서 일본 경찰에 여러 번 체포되었다.
신석구는 1935년 5월에서 1939년 4월까지 천안 지방 감리사로 천안 구역을 담임하며 천안에서도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8년 7월 신사 참배(神社參拜)와 전승 기원 예배(戰勝祈願禮拜)를 거부하여 천안 경찰서에 체포되었고, 복역 중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광복 후에는 북한에서 반공 운동을 전개하다가 6·25 전쟁 중 북한군에게 피살되었다.
[저술 및 작품]
자신의 일생과 신앙을 기록한 『자서전』을 남겼다.
[묘소]
서울 동작동 국립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신석구의 공훈을 기려 1963년에 건국 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