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11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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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種德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선명 |
추모 시기/일시 | 1960년 - 정종덕 효자비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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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배향지 | 정종덕 효자비 - 충청남도 천안시 입장면 산정리 |
성격 | 효자 |
성별 | 남 |
[정의]
현대 천안 지역의 효자.
[활동 사항]
정종덕(鄭種德)은 아홉 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어렵게 성장하였다. 가난한 살림에도 형제간에 우애가 깊고 정성을 다해 홀어머니를 모셨다. 정종덕의 바른 성품과 효성에 대한 이웃의 칭찬이 많았다. 외가의 도움으로 농경지를 소작하게 되어 굶주림을 면하였다. 20세 되던 해에 결혼을 하고 가족들과 함께 노력하여 논밭을 사들이고 가난을 면하게 되었다.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성으로 밤낮으로 어머니의 건강을 살폈다. 하루는 어머니가 친정에 가셨다가 오겠다는 날에 돌아오지 않았다. 정종덕은 밤길에 40리나 되는 경기도 안성까지 가서 어머니를 모시고 왔다. 정종덕은 농경지를 마련하여 살림이 안정되자 좋은 음식과 의복으로 어머니를 편안하게 모셨다.
그러나 어머니가 병석에 눕고 말았다. 정종덕은 어머니의 병을 고치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하였다. 어렵게 장만한 논밭을 팔아 이름난 의원은 모두 찾아 약을 써보았으나 병이 악화되어 목숨이 위독하게 되었다. 실의에 빠져 있던 정종덕은 사람의 피가 좋다는 말을 듣고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어머니에게 넣어드렸다. 건강을 회복한 어머니는 80세까지 장수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정종덕은 60세의 노령으로 시묘 살이를 하였다. 묘 앞에서 움막을 짓고 100일간 있은 뒤에 매월 초하루와 보름이면 성묘하기를 잊지 않았다.
[상훈과 추모]
이 소문이 널리 퍼지자 유림과 군수는 정종덕의 효행을 치하하여 정종덕의 나이 61세 때인 1960년 효행비를 세우게 되었다. 입장면 산정리에 세워진 정종덕 효자비에는 ‘효자 봉화 정 공 종덕지비(孝子奉化鄭公鍾德之碑)’라 비제를 쓰고, “오직 자식된 도리로서 어떤 어려움도 극복하여 직분을 다했을 따름이다. 어머니의 뜻을 살펴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지극한 정성으로 그 어머니가 난치병에 걸려 죽음의 상태에 있을 때 손가락을 끊어 피를 받아 어머니에게 드리니 곧 나아서 장수하였다.”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