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8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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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緻 |
이칭/별칭 | 사정(士精),남봉(南峰),심곡(深谷)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경수 |
[정의]
조선 후기 천안 지역에 우거한 문신·학자.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정(士精), 호는 남봉(南峰)·심곡(深谷)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김석(金錫), 할아버지는 헌납을 지낸 김충갑(金忠甲)이다. 아버지는 부사를 지낸 김시회(金時晦)이며, 어머니는 양언개(楊彦漑)의 딸 청주 양씨(淸州楊氏)이다. 임진왜란 때 진주 대첩의 전공을 세우고 순국한 충무공 김시민(金時敏)에게 입양되었다. 조선 8대 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김득신(金得臣)이 아들이다.
[활동 사항]
김치(金緻)[1577~1625]는 1597년(선조 30) 알성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說書)를 거쳐 1608년에 사가독서하였다. 광해군 때 사복시 정·이조 참의·동부승지·대사간을 거쳐 홍문관 교리와 부제학 등을 역임하였고, 병조 참지에 올랐으나 독직 사건으로 파면되었다. 조정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당대의 문제점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 대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한때 이이첨의 심복으로 있으면서 주위의 지탄을 받았으며, 대사간으로 있을 때는 영창 대군 살해 음모를 반대하는 정온(鄭蘊)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의 학정이 날로 심해짐을 깨닫고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두문불출하였다. 인조반정이 있을 무렵 심기원(沈器遠)과 사전에 내통하여 다시 벼슬길에 올랐으나, 이후 대북파로 몰려 유배되었다. 그 뒤 풀려나 동래 부사를 거쳐 1625년(인조 3)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는 『심곡 비결(深谷煉訣)』이 있다.
[상훈과 추모]
동래 부사로 재임 시 선정을 베풀어 동래부 유생들이 선정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