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7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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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于學儒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문철영 |
[정의]
고려 시대 천안 목천 출신의 무신.
[가계]
본관은 목천(木川).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를 지낸 우방재(于邦宰)의 아들이다. 부인은 이의방(李義方)의 누이 전주 이씨(全州李氏)이다.
[활동 사항]
우학유(于學儒)[?~1179]는 목주(木州)[지금의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면] 출신으로, 성품이 활달하며 기개가 있었다고 전한다. 의종(毅宗)과 명종(明宗) 양대에 왕궁을 숙위(宿衛)하며 충성을 다했다. 이고(李高)·이의방(李義方) 등이 반란을 모의하면서 우학유에게 군대를 맡기고자 했는데, 우학유가 말하기를 “공들의 뜻은 크도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가 항상 나를 경계해서 말하기를, ‘무관이 문관에게 굽혀 지내고 있으니, 이 일이 어찌 분하지 않느냐. 그것들을 없애기란 썩은 가지 꺾기보다도 쉬운 일이지만 문관이 해를 당하면 역시 발길을 돌리기 전에 화가 우리들에게 미칠 것이니 또한 너는 마땅히 삼가라.’ 하셨는데, 우리 아버지는 비록 돌아가셨어도 그 말이 아직도 귀에 있는지라, 죽어도 따르지 않겠노라.”라고 했다 한다.
1170년(고려 의종 24) 이고와 이의방이 무신란으로 정권을 잡은 뒤 우학유를 해치려 하니 우학유가 두려워하여 이의방의 누이와 혼인함으로써 죽음을 면하였다. 1172년(명종 2) 금오위 상장군(金吾衛上將軍)으로 서북면 병마사가 되었다. 1179년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승진했으나 이 해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