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5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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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華祝館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오룡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홍제연 |
건립 시기/일시 | 1602년 - 화축관 창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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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축|증축 시기/일시 | 1670년 - 화축관 중수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733년 - 화축관 중수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832년 - 화축관 중수 |
원소재지 | 화축관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오룡동 |
성격 | 행궁 |
[정의]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오룡동에 있었던 조선 후기의 행궁.
[개설]
화축관(華祝館)은 조선 시대에 천안군에 건립되었던 행궁이다. 천안 군수 노대하(盧大河)가 1602년(선조 35)에 건립하였고, 천안 군수 조경빈(曺敬彬)이 중수하였다. 이에 대한 우암 송시열의 기문이 남아 있다. 그 후로도 수차례 중수하였고 일제 강점기에는 경찰서와 헌병대 건물로 사용되다 이후 모두 철거되었다. 관련 시설 중 화축관의 문루였던 영남루만 현존하고 있다.
[위치]
천안시 동남 구청에서 영성로를 따라 남쪽으로 200m 거리에 천안 중앙 초등학교가 있다. 화축관은 천안 중앙 초등학교 일대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변천]
조선 시대에 국왕이 온양 행궁으로 행차를 하면서 천안에 머물렀던 기록이 보이는데 조선 초에는 아무 건물도 없는 홍경원 벌판에서 유숙을 하기도 하였다. 선조 대에 이르러서 천안 군수 노대하가 1602년에 화축관을 세웠고, 그 뒤로 국왕이 화축관에 머물렀다고 한다. 이괄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로 이동하던 와중에 1624년 2월 12일 천안에 도착해 화축관에 머무르다 관군의 승전 소식을 듣기도 하였다.
우암 송시열의 「천안현 화축관기(天安縣華祝館記)」에 1670년(현종 11) 천안 군수 조경빈이 화축관을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이때에 정관의 동헌(東軒)을 먼저 수리하고 다음으로 자성어실(慈聖御室)을 고쳤으며 낭청(廊廳)·대청(大廳)·무고(武庫)등 총 39칸을 수리하였고, 그 비용은 경상 감사 이태연(李泰淵), 통제사 이지형(李枝馨)·김경(金鏡), 충청 병사 이원로(李元老), 전라 병사 민진익(閔震益)이 보태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밖에 『만기요람(萬機要覽)』 재용편 호조 각장 사례 별례방 기록 중에는 온천 행궁을 수리할 때에 천안 화축관의 예(例)에 따라 거행하라는 내용이 보인다. 또한 『숙종실록』에는 1717년(숙종 43) 숙종이 국왕의 온천 행차 때에 거처하시는 관사에 사객(使客)이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면서 다만 직산(稷山)의 영소정(靈沼亭)과 천안의 화축관은 선조(先朝)가 지은 것이니 제외하도록 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영조실록』 1750년(영조 26) 9월 15일에는 대가(大駕)가 직산현(稷山縣) 영소정에서 머물렀을 때에 영조가 직접 시를 짓고, ‘옛날을 추억하는 감흥[憶昔興感]’이란 네 자를 친히 써서 새겨 화축관에 걸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화축관은 여러 차례 중수되었는데 중수기(重修記)에는 1733년(영조 9), 1832년(순조 32)에 중수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형태]
화축관의 건물 형태에 대해서는 영조 대에 편찬된 지리지인 『여지도서』에 상세하게 나타나는데 이에 따르면 화축관은 관아의 서쪽에 있으며 정청(政廳) 10칸[전후 퇴주 9칸], 동서랑(東西廊) 각 5칸, 시녀방(侍女房) 3칸, 정문(正門) 2칸의 큰 규모이었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천안군의 고지도에는 천안군 읍치의 아사와 객사 건물 사이에 화축관이 그려져 있다. 가장 상세하게 보이는 것은 1872년에 제작된 지방 지도이다. 여기에는 건물의 배치가 매우 잘 나타나 있어 문루인 영남루의 형태도 파악이 된다. 지도에는 영남루를 지나 사령청이 동서에서 마주보고 안쪽 내삼문을 지나면 동익랑과 서익랑이 마주보고 가장 안쪽에 화축관의 본 건물이 있다. 주위에는 낮은 담이 둘러져 있다.
[현황]
화축관은 일제 강점기에 경찰서 숙소 및 헌병대 사무실로 사용되면서 크게 훼손되었고, 광복 이후에는 학교 관사로 활용되다가 헐리었다. 화축관의 문루인 영남루만 남아 있지만, 영남루는 1959년 천안 삼거리 공원으로 이전 복원됨에 따라 2013년 현재 화축관 터에는 화축관과 관련된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화축관 터에는 현재 천안 중앙 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의의와 평가]
화축관은 국왕이 머무는 행궁으로 다른 관아 건물보다도 철저한 관리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천안 지역사에 화축관은 큰 영향을 미쳤다. 왕실의 행차로 주민이 고초가 심하니 대동미를 가을로 미뤄 받으라는 숙종의 명은 이 같은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화축관과 관련된 연구 조사가 이루어진 바가 없고, 화축관의 문루로 쓰였던 영남루만 현존하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