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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의 금 채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485
한자 蒙古-金採掘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문철영

[정의]

고려 시대 1277년(충렬왕 3)에 몽고가 직산에서 금을 채굴하게 한 사건.

[역사적 배경]

몽고와 강화한 이후 고려의 자주성은 많은 손상을 입었다. 원은 고려 조정을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나오게 하고 고려의 왕을 원의 공주와 혼인시켜 부마국으로 삼았다. 고려 왕실의 호칭과 격은 부마국에 걸맞은 것으로 바뀌었으며, 아울러 관제도 개편되고 격도 낮아졌다. 원은 두 차례에 걸친 일본 원정을 단행하면서 고려로부터 선박, 식량, 무기를 비롯한 전쟁 물자와 함께 군대와 선원 등 인적 자원도 징벌하였다. 또한 공녀라 하여 고려의 처녀들을 뽑아 갔으며, 금·은·베를 비롯하여 인삼·약재·매 등의 특산물을 징발하여 농민들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또한 매를 징발하기 위해서 응방이라는 특수 기관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관련 기록]

『고려사』에 보면, 1277년(충렬왕 3)에 “전 군기(軍器) 주부(注簿) 홍종로(洪宗老)가 그의 아들 홍인백(仁伯)의 죄를 용서받으려고 달로화적을 달래기를 “나는 금이 산출되는 곳을 많이 안다”고 하였다. 이에 국학 직강(直講) 최양(崔諹)을 파견하여 홍종로를 데리고 홍주 직산, 정선에서 금을 채굴케 하였는데 백성 1만 1446명을 70일간이나 부려서 겨우 7냥 9푼을 얻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는 더욱 자세한 이야기가 나온다. “원종(元宗) 14년에 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남방에서 금을 캤다. 충렬왕(忠烈王) 3년에 원나라에서 다루가치[達魯花赤]를 보내어 본국의 신하와 함께 도징(淘澄)[금을 이는 것]하여 금 2전 2푼을 얻었고, 홍주(洪州) 등처로 가서 70일 동안 금즙(金汁)[금의 용액]을 일어 인부 1만 1446명을 써서 겨우 금 7냥 9푼을 얻었다.”하며, 보론으로 “고려 때에 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직산(稷山) 서쪽에서 금을 캐어 겨우 두서너 근[數三斤]을 얻었다. 지금 성환역(成歡驛) 위에 땅을 파서 구덩이를 이룬 것은 모두 이것들이다.”라는 『여암고(旅庵稿)』의 기록도 소개하고 있다.

[결과]

직산은 옛날부터 금의 산지로 이름이 나있었다. 원은 당시 고려를 산금국(産金國)이라 하여 금을 수탈하다가 나중에는 직접 채굴해 갔다. 당시 고려 조정은 원의 요구에 처음에는 가능한 범위까지 금을 채취하여 보냈다. 그러나 그 요구량이 점차 늘어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고려는 본래 산금국이 아니라는 구실을 들어 금의 공물을 이행하지 않았다. 이에 원의 조정에서는 직접 관원을 파견하여 채광하였는데, 위의 기록에서 보듯 성과는 미미하였다. 또한 원의 관리가 직산 땅에서 100여 군데나 팠으나 금을 얻지 못했다 하며, 이때부터 옛 직산 땅을 금굴평(金堀坪)이라 불렀다는 지명 유래도 보인다. 이로써 직산이 오래전부터 금 산지로 유명했으며, 고려 시대의 직산 사람들이 원의 수탈에 저항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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