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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열사와 그의 가족 이야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011
이칭/별칭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유관순 일가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내수

[정의]

충청남도 천안시 아우내 3·1 운동을 주도한 유관순과 그 가족의 독립운동.

[병천 아우내 만세 운동과 유관순]

병천 아우내 장터 3·1 만세 시위를 주도한 유관순(柳寬順)[1902~1920]은 천안 동면 지령리에서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어머니 이소제(李少悌) 사이의 둘째 딸로 출생하였다.

1919년 3월 1일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을 때 유관순은 이화 여자 고등 보통학교 1학년이었고, 한 달 후에는 2학년이 될 예정이었다. 유관순은 공주 감리교회의 제이 햄몬드 샤프 여사의 추천으로 기숙사 생활을 하며 공부하고 있었다. 사촌 언니 유예도(柳禮道)샤프 여사의 추천으로 1년 먼저 이화 학당에서 공부하고 있었고, 이때 3학년 졸업반이었다.

파고다 공원에서 시작된 청년 학생들과 시민들의 시위 행렬이 “대한 독립 만세!”를 연달아 외치며 정동 덕수궁 뒤편에 있는 이화 학당 교문 앞에 이르자 시위대는 이화 학당 학생들의 참여를 촉구했다. 프라이 교장은 교문 앞에 서서 학생들의 시위 참여를 막았다.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학생들은 항의했고, 유관순은 친구 몇 명과 함께 학교 담을 넘어 서울 시내 만세 운동에 합류하였다.

3월 5일 남대문역[현 서울역] 앞에서 학생단 주도하에 수만 명에 이르는 학생과 시민들의 제2차 대규모 만세 운동이 있었다. 유관순은 이때에도 참여했다가 붙잡혀 경무총감부에 구금되었다. 다행히 이화 학당 당국이 경무총감부와 교섭하여 다른 학생들과 함께 풀려날 수 있었다. 이러한 시위가 있기 전에도 유관순은 평소 태극기를 그려 교실과 기숙사 벽에 붙인다든가, 다섯 명의 친구들과 5인의 결사대를 만들어 태극기와 애국가를 적은 종이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등의 애국 의식을 보여 주었다.

3월 13일 유관순유예도는 고향 천안으로 내려와 함께 마을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독립 자금을 모금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가난한 동리라 모을 돈이 없었다. 어른들이 “우리도 차라리 만세 운동을 벌이자.”라고 하였고, 아버지 유중권과 숙부 유중무(柳重武), 동네 어른 조인원(趙仁元)[조병옥의 아버지] 등이 나섰다. 이들은 4월 1일 병천[아우내] 장날을 기해 만세 운동을 일으키기로 거사 계획을 세웠다. 유관순은 인근 지역을 돌며 유림 대표와 유력 가문의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만세 운동에 나설 것을 적극 설득하였다. 또한 마을 사람들과 함께 만세 운동에 쓸 태극기를 만들었다.

3월 31일 밤 인근 각지의 지사들에게 다음날의 거사를 알리기 위해 천안, 청주, 진천 방면의 산 위에서 횃불을 올리기로 되어 있었다. 유관순은 집 뒤 매봉산에 올라가 횃불을 올렸고, 다른 마을의 산봉우리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횃불이 올랐다.

4월 1일 천안 인근 지역 곳곳에서 약 3천 명의 장꾼이 아우내 장터에 모여들었다. 유관순은 장대에 매단 큰 태극기를 든 채 시위 대열에 앞장섰다.

병천 일본 헌병 주재소의 헌병들이 시위대를 제지했고, 그 상황에서 유중무는 빈사 상태에 빠진 유중권을 업고 김용이·조인원·조병호·유관순 등 약 40명과 함께 주재소에 몰려갔다. 유중무는 두루마기 끈을 풀어 헤치고 일본 헌병에게 큰 소리로 항의했다. 조인원도 저고리를 벗고 주재소장과 헌병의 총을 잡아 제쳤다. 유관순은 “우리는 나라를 찾기 위하여 정당한 일을 하고 있는데 왜 무기를 사용하여 우리 민족을 죽이느냐?”고 외쳤고, 헌병이 총을 들이대자 “죽이려면 죽여 보라.”고 하며 달려들며 격렬하게 항의했다.

그러는 동안 주재소 근처에는 약 1천 5백여 명의 군중이 모여 들었다. 총기를 사용하려는 헌병들의 총부리에 달라붙어 군중들과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그때 조인원은 가슴에 총을 맞고 왼쪽 팔이 칼에 찔리는 부상을 입었으며, 다수의 사상자와 체포자를 남기고 시위대는 후퇴하였다. 후퇴한 군중은 천안·병천 간의 전화선을 절단하고 전신주 1개도 쓰러뜨렸으며, 갈전면 사무소와 우편소를 습격한 뒤 부근의 산 위와 시장에서 사태의 진전을 주시하였다.

얼마 안 있어 지원병이 도착하여 시위대에 총격을 가했다. 시위대는 일순간 흩어졌으나 곧 다시 몰려들었다. 여성들은 치마에 냇가의 돌을 담아 나르고 남자들은 돌멩이를 던지며 일제의 발포에 맞섰다. 이 과정에서 유관순의 어머니를 비롯하여 19명이 목숨을 잃었고,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다.

공주 지방 법원은 유관순, 유중무, 조인원 세 사람에게 징역 5년을 선고하였다. 3·1 운동의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던 손병희도 징역 3년을 언도받은 것을 볼 때 평화적인 시위로 받은 5년형은 엄청난 중형이 아닐 수 없었다. 아우내 만세 운동 주도자들은 서울 복심 법원에 공소를 제기하였다.

경성 복심 법원에서 유관순은 징역 3년형이 확정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에 불복하여 다시 최종심인 고등 법원에 상고하였다. 그러나 유관순은 “삼천리 강산이 어디인들 감옥이 아니겠느냐.”라고 하며 상고를 포기했다.

서대문 감옥에 수감된 유관순은 계속하여 독립 만세를 부르다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함께 수감되어 있던 이화 학당 박인덕 교사의 만류로 한동안 잠잠해졌다가 1920년 3월 1일 3·1 운동 1주년을 맞자 유관순은 또다시 감옥 안에서 독립 만세를 주도하였고, 이때 고문을 당해 방광이 파열되었다. 아우내 만세 운동 당시 입은 상처와 그간의 잦은 고문과 방광 파열이 겹친 유관순에게 일제 당국은 치료를 거부하고 방치하였다.

감옥 안에서 함께 옥살이를 했던 어윤희유관순이 배고픔과 외로움, 동생들에 대한 걱정으로 슬퍼했으며, 고문과 상처의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이화 학당 교사들과 오빠가 마지막으로 면회했을 때는 살이 썩어가고 있었다. 결국 유관순은 1920년 9월 28일 서대문 감옥 안에서 숨졌다. 약 보름이 지나서야 이화 학당에서 시신을 인계받아 정동 교회에서 간략한 장례 의식을 거행하고 수레에 실어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했다. 그 후 유관순의 묘지는 일제의 도시 개발에 밀려 사라지고 말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유관순의 공적을 기려 1962년에 건국 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 복원된 생가와 기념 교회가 있고, 탑원리유관순 사우와 기념관이 있다.

[아우내 만세 운동에 참여한 유관순 가족]

유관순의 가족과 집안사람들 또한 3·1 운동에 참여하여 목숨을 잃거나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 가족으로 유명하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유관순 열사의 가족 및 집안사람들 가운데 독립운동가로 훈·포상을 받은 사람은 유관순 본인과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제, 오빠 유우석(柳愚錫), 작은아버지 유중무, 사촌 언니 유예도, 오촌 조카 유제경(柳濟敬), 종조할아버지 유도기(柳道基) 등 8명이다.

유중권은 1919년 3월 13일 서울 만세 시위에 참여했던 딸 유관순이 고향으로 내려와 서울의 독립 만세 운동 소식을 전하고 고향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독립 만세 운동을 일으킬 것을 설득하자, 동생 유중무·조인원 등과 4월 1일 아우내 장날을 기해 만세 운동을 일으키기로 거사를 계획하였다.

1919년 4월 1일 병천 아우내 장터에 약 3천 명의 장꾼이 모여들었고, 오후 1시 조인원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유관순은 장대에 큰 태극기를 매단 채 독립 만세를 선창하였다. 조인원, 유중권·이소제 부부, 김상헌, 김주헌, 김교선, 김상철, 조병호, 유관순 등이 시위 대열에 앞장섰다. 3천여 명이 운집한 아우내 장터는 삽시간에 대한 독립 만세 소리로 진동하였으며, 여세를 몰아 시위 군중이 일본 헌병 주재소로 접근하자 시위 대열의 기세에 놀란 일본 헌병이 총검을 휘둘렀다. 이때 일본 헌병들이 총검으로 선두에 선 유관순의 옆구리를 찔렀다. 헌병이 상처를 입은 유관순의 머리채를 잡고 주재소로 끌고 가는 것을 본 유중권은 부인인 이소제와 함께 끌려가는 딸을 뒤따르며 필사적으로 독립 만세를 외쳤고, 일본 헌병이 휘두른 총검에 찔려 숨을 거두었다.

유관순의 어머니이자 유중권의 아내인 이소제도 1919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전개된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남편 유중권, 딸 유관순과 함께 헌병 주재소로 달려가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소제는 일본 헌병의 총검에 찔려 남편이 죽자 더욱 열렬히 독립 만세를 부르며 항거했고, 무도한 일본 경찰이 총을 난사하여 남편과 함께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공주 3·1 운동에 참여한 유우석]

유중권의 장남이자 유관순의 오빠인 유우석은 1919년 4월 1일의 공주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유우석이 자란 동면 지령리 마을은 1900년대 초 전 주민이 감리교로 개종하여 마을 자녀들이 일찍부터 신교육을 받았다. 유우석수신면 장산리의 감리교회가 운영하는 장명학교에서 조만형과 함께 공부했다.

1919년 4월 1일 병천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유우석은 공주 영명학교 학생으로 공주에 있었기 때문에 병천 만세 운동에는 참여하지 못했고, 같은 날 영명 학교가 중심이 된 공주 읍내 만세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유우석은 3월 12일과 15일에 걸쳐 공주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전개된 데 자극받은 영명학교 교사 김관회(金寬會)·이규상(李圭商)·현언동(玄彦東), 졸업생 김사현(金士賢), 재학생 오익표(吳翼杓)·안성호(安聖鎬) 및 목사 현석칠(玄錫七)·안창호 등이 3월 24일 밤 9시경 영명학교에서 모임을 갖고 4월 1일의 공주읍 장날을 기해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김관회가 영명학교 학생들을 동원하기로 했고, 서울에서 가져온 「독립 선언서」를 등사판으로 밀어 1천 장을 준비하기로 하였다. 이때 유우석도 학생 대표로서 이 계획에 참여하였다. 3월 30일 김관회로부터 학생 동원과 「독립 선언서」 등사를 부탁받은 영명학교 조수 김수철(金洙喆)의 집에서 유우석노명우(盧明愚)·강윤(姜允)·윤봉균(尹鳳均) 등과 만나 독립 만세 운동 계획에 대하여 논의한 뒤, 이튿날 오후 3시경 이들과 함께 기숙사에서 독립선언서 1천여 장을 등사하고 대형 태극기 4개를 만들었다.

4월 1일 오후 2시, 유우석은 다른 학생 대표들과 함께 태극기와 「독립 선언서」를 장터에 모인 시위 군중에게 나누어 주고 선두에 서서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날의 독립 만세 운동은 일제의 강력하고 신속한 저지로 좌절되어 비교적 소규모로 전개된 채 끝났고, 유우석은 주동자로 체포되어 8월 29일 공주 지방 법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3년 강원도 양양군(襄陽郡)의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동하였던 조화벽(趙和璧)과 결혼하였으며, 1927년에는 원산 청년회(元山靑年會)를 조직해 활동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함흥 지방 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구형받는 등 계속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유준석(柳俊錫), 유관옥(柳寬玉)이라는 가명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광복 후 유우석은 대한 노동 총연맹을 결성하여 위원장을 역임하였고, 전국 혁명자 총연맹 중앙 집행 위원, 통일 독립운동자 중앙 협의회 간사, 유도회 청년회 총본부장, 순국선열 유족회장 등을 역임하다 1968년 5월 28일 사망하였다.

[유관순의 작은 아버지댁도 독립운동가 가족]

유관순의 작은아버지이며 유중권의 동생인 유중무는 당시 지령리 교회 교사로, 병천 3·1 운동 주도자의 한사람이다. 일찍이 기독교로 개종하여 지령리 감리교회를 이끌었다. 1912년 장남 유경석은 공주 영명학교 고등과에, 1914년경 딸 유예도를 이화 학당으로 유학 보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유예도는 23세의 나이로 이화 학당 3학년 졸업반이었다. 이화 학당에서 독립운동에 관계하던 유예도유관순과 함께 고향으로 내려와 지역의 인사들과 만세 운동을 벌이고자 노력하였고, 이에 유중권·유중무·조인원 등이 나서서 거사를 계획하였다.

1919년 4월 1일 홍일선(洪鎰善)·김교선(金敎善)·한동규(韓東奎)·이순구(李旬求)·조인원, 그리고 형인 유중권, 조카 유관순 등이 병천 아우내 장날을 기하여 일으킨 대대적인 독립 만세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날 오후 1시경 조인원이 태극기와 “대한 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세우고 「독립 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 독립 만세를 선창하자, 3천여 명이 운집한 아우내 장터는 대한 독립 만세 소리로 진동하였다.

그는 시위 군중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여세를 몰아 시위 군중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행진할 때에는 선두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열을 이끌었다. 일본 헌병 주재소에서는 시위 대열의 기세에 놀라 총을 난사하였고, 천안에서 불러들인 일본 헌병과 수비대까지 가세하여 무자비하게 총검을 휘둘러대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당하거나 중태에 빠졌다.

유중무는 일본 헌병의 총에 맞아 빈사 상태에 빠진 형 유중권을 들쳐 업고 주재소로 달려가, 주재소 헌병들을 압박하며 인명 살상에 항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유중권 등 19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유중무는 병천 만세 운동의 주동자로 체포되어 공주 지방 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며, 9월 11일 경성 복심 법원에서 징역 3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유관순의 사촌언니인 유예도유중무의 장녀이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 유예도는 23살의 나이로 이화 여자 고등 보통학교 3학년 졸업반이었다. 서울의 파고다 공원에서 열린 독립 선언문 선포식에 사촌동생 유관순과 함께 참가하한 뒤 독립 만세 시위에 가담하였다. 3월 13일에는 유관순과 함께 귀향하여 갈전면(葛田面) 아우내 장터에서 4월 1일을 기하여 독립 만세 시위를 일으키기로 계획하고 마을 어른들과 상의하였다.

4월 1일 3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며 태극기를 흔들고 시가를 행진하면서 시위가 시작되었다. 일본 헌병의 발포로 선두에 섰던 큰아버지 유중권조인원(趙仁元) 등 19명이 목숨을 잃고 수십 명이 부상을 당하였으며, 아버지 유중무유관순 등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유예도는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가까스로 피신하여 두안골의 외가로 피신하였다. 수색의 손길이 외가까지 미쳐오자 외삼촌이 진천으로 피신시켰고, 다시 홍성으로 피신하여 광복의 그날까지 숨어 지냈다. 광복 후에는 농촌 계몽 지도원, 반탁 운동 지도 위원, 애국 부인회 지방 책임자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유관순의 오촌조카이며 유중무의 손자인 유제경은 평소에 독립 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공주 고등 보통학교를 졸업할 때 졸업 앨범 편찬 위원이 되어 앨범에 일본 연호가 아닌 단군기원을 쓰고 무궁화를 그려 넣었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끌려가 심문을 받았다.

1936년 소학교 및 보통학교 교원 시험에 제1종으로 합격하여 은산 보통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고 교사 생활을 시작하였다. 1941년 4월 1일 충남 공주군 장기(長岐) 국민 학교 6학년 담임교사로 있으면서, 천황을 신격화하고 한국인을 황민화하려는 것에 반대하여 기회 있을 때마다 학생들에게 올바른 민족의식과 자주 독립 정신을 고취하였다.

일제의 주목을 받던 유제경은 학생들의 졸업 기념 사진첩에 “땀을 흘려라, 피를 흘려라, 눈물을 흘려라”라는 문구를 써 준 것이 자주 독립 사상을 고취시키는 행위라 하여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45년 2월 5일 고등 법원에서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이 확정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형무소 수감 중에 ‘해남도 파견 보국대’라는 이름으로 중국 하이난 섬[海南島]에 끌려가서 강제 노역을 하다가 귀환하였다.

유관순의 종조할아버지인 유도기유관순·유중권·유중무·조인원이 중심이 되어 진행되었던 독립 만세 운동 계획에 찬동하여 적극적으로 후원하였고, 태극기를 제작하여 1919년 4월 1일 병천 아우내 장터에서 거행된 만세 시위에 동참하였다.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에서는 조인원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했고, 조인원·유중권 이소제 부부·유관순·김상헌·김주헌·김상철·김교선 등이 시위 대열을 이끌었다. 유도기도 몰래 감추고 있던 태극기를 흔들며 군중들의 사기를 고양하고, 기세를 북돋우며 독립 만세 시위를 계속하다가 체포되었다. 그해 5월 9일 대전 지방 법원 공주 지원에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렇듯 유관순 열사와 그 가족 및 집안사람들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피 흘리며 투쟁을 전개한 천안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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