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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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鳳柱-聖居所牛里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성섭 |
[개설]
소우리는 서북구 성거읍에 속하는 지역인데, 한때 전 국민을 하나로 만들었던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 선수를 배출한 마을이다. 이봉주 선수가 각종 대회에서 활약하면서 이 마을은 행정 지명보다는 ‘이봉주 마을’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이봉주 선수로 인해 뜨거웠던 소우리]
이봉주 마을로 불리는 성거읍 소우리는 한적한 마을이다. 천안 도심을 빠져나와 이봉주 마을로 가다 보면, ‘얼마 후면 이봉주 마을에 도착하겠구나’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다. 이봉주 마을로 가는 도로의 이름부터 ‘봉주로’인 것이다. 봉주로는 직산-성거를 잇는 시도 10호선이다. 봉주로를 따라 가다 보면 작은 눈의 친숙한 한 청년이 마을 입구에서 맞이해 준다. 바로 이봉주 선수가 그려진 대형 입간판이다. 그리고 사진 옆에 ‘이봉주 마을’이라는 마을 이름이 선명하다.
입간판을 지나 마을로 들어가면, 다른 지역의 여느 농촌 마을과 똑같은 조용한 곳이다. 그러나 소우리는 한때 이봉주 선수로 인해 천안에서 가장 뜨거운, 아니 전국에서 가장 떠들썩한 마을이었다. 이봉주 선수가 마라톤 대회에서 한국 신기록을 수립하는 등 우수한 성적을 거두기 시작하면서 천안시에서는 마을 이름을 ‘이봉주 마을’로 바꾸어 홍보에 나섰던 것이다.
각종 방송사는 물론 지역 기관장의 방문이 끊이지 않았으며, 1999년 12월 31일에는 이봉주 선수를 기념하는 ‘마라토너 이봉주 기념 회관’이 건립되었다. 이 건물은 마을 어르신들과 주민의 쉼터이기도 한 경로당을 겸하고 있으며, 이봉주 선수가 각종 대회에서 수상한 상패 및 여러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현재는 도난 및 관리상의 어려움으로 이봉주 선수가 전시품을 모두 회수해 갔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마을을 뜨겁게 달궜던 것은 이봉주 선수를 향한 마을 주민들의 응원이었다. 이봉주 선수가 은퇴하여 ‘이봉주 마을’이라는 콘텐츠가 다소 약화된 감이 있지만, 그를 응원하며 우승을 기원했던 그날의 뜨거웠던 함성은 여전히 유효하다. 지역 화합의 장인 성거읍 체육 대회가 열릴 때면 이봉주 선수가 성화 봉송을 하며 지역 주민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역할을 해 주고 있다. 천안에서는 이봉주 선수와 함께하는 이봉주 천안 흥타령 마라톤 대회를 매년 개최하고 있는데, 이봉주 마을이 마라톤 코스에 포함되지 않은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이봉주 선수가 달린 ‘봉주로’]
이봉주 선수는 천안 성거 초등학교와 천성 중학교를 졸업하고 천안 농업 고등학교[현 천안 제일 고등학교] 축구부에서 활약하다가, 광천 고등학교 체육 교사의 권유로 마라톤을 시작했다. 이봉주는 1993년 호놀룰루 국제 마라톤 대회 우승, 1995년 동아 국제 마라톤 대회 우승,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준우승, 1996년 후쿠오카 국제 마라톤 대회 우승, 1998년 로테르담 국제 마라톤 대회 준우승, 2000년 동경 국제 마라톤 대회 준우승, 2000년 후쿠오카 국제 마라톤 대회 준우승, 2001년 보스톤 마라톤 대회 우승 등의 화려한 입상 경력을 자랑한다.
또한 2009년 제90회 전국 체전 마라톤 대회에서 2시간 15분 25초의 기록으로 1위의 성적을 거두었다. 이는 이봉주 선수의 은퇴 경기이자 41번째 완주 기록이었다. 이봉주 선수의 입상 경력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두 번의 한국 신기록을 세웠다는 점이다. 1998년 로테르담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2시간 7분 44초의 성적으로 한국 신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2000년 동경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종전 기록을 24초 앞당긴 2시간 7분 20초의 기록으로 자신의 한국 신기록을 경신하였다.
이봉주 선수가 그토록 화려한 경력을 남길 수 있었던 데는 치열한 노력이 깃들어 있는데, 여기에서는 마을의 입지 조건과 과거 농촌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일화가 있어서 소개하고자 한다.
마을 주민들은 이봉주 선수가 큰 선수가 될 수 있었던 건 ‘심부름’ 때문이라고 말한다. 주민들에 따르면 마을에서 3~4km쯤 떨어진 곳에 양조장이 있었고, 집안의 막내인 이봉주 선수가 술심부름을 도맡아 어릴 때부터 주전자를 들고 막걸리 심부름을 하였다는 것이다. 현재의 도시에서 느껴볼 수 없는 농촌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부분이다. 이봉주 선수가 먼 거리의 막걸리 심부름을 하면서 나름대로 폐활량이 좋아진 것 아니겠냐는 주민들의 해석이다.
이유가 어찌됐건 이봉주 선수는 소우리를 빛내고 천안과 한국의 인물로 세계 마라톤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천안시에서는 직산-성거를 잇는 국도 일부 구간을 ‘봉주로’라고 명명하여 다른 지역의 사람들에게 천안의 자랑 이봉주 선수를 홍보하고 있다. 사실 지역 출신 유명 인사 등 지역의 문화 콘텐츠를 이용한 마케팅 전략은 다른 자치 단체에서도 자주 이용되고 있는 사례이다.
[마을을 지켜주는 보호수]
소우리에는 이봉주 선수 못지않게 유명한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바로 화려함을 자랑하는 소나무이다. 이 소나무는 수령이 300년 이상 되었으며, 높이 14미터에 둘레는 2.4미터에 이른다. 1982년 11월 1일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소우리의 보호수는 다른 보호수와는 달리 수령만 오래 된 게 아니라 멋진 자태를 뽐내고 있다. 그 모습은 속리산의 정2품송 못지않게 빼어난 기품을 자랑하는 만큼 마을에서도 신목으로 여기고 있으며, 이곳에서 마을의 안녕과 번성을 기원하는 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제는 보통 정월 보름 전에 올렸다고 전하나 현재는 마을 차원에서 올리는 제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개인적으로 치성을 드리는 모습도 볼 수 없다고 한다.
마을에서 제를 올리는 모습은 볼 수 없지만 마을 주민들은 여전이 이 소나무를 아끼고 신령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큰 사건이 있었는데, 마을 주민의 전언에 따르면 2012년 어느 날 소나무의 가지가 부러진 채로 땅에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신목으로 여기는 소나무의 가지가 부러졌으니 마을 주민들은 혹여 마을에 불길한 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불안해했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은 가지를 부러뜨린 범인을 찾고자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며, 심지어는 인근의 경찰이 출동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보호수를 해한 범인은 찾지 못하였다. 결국 마을 주민들은 보호수 앞에서 제를 지내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으로 보호수 위해 사건은 마무리를 지었다.
마을의 수호신인 이 소나무는 또 다른 의미에서 마을을 지켜 주고 있다. 그 크기가 웅장한 만큼 커다란 그늘을 제공해 주어서 보호수 아래에 큼지막한 평상을 마련하여 마을 주민들의 쉼터로 기능하는 한편, 주변에 다양한 운동 시설이 조성되어 마을 주민들의 건강을 지켜 주는 역할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