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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012
한자 弘慶寺-創建-燒失
분야 종교/불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 대홍리
시대 고려/고려
집필자 김한상

[개설]

홍경사(弘慶寺)현종(顯宗)이 불행하게 세상을 떠난 아버지 안종(安宗) 욱(郁)을 기념하여 지은 사찰이다. 안종태조의 아들로 어머니는 신라의 왕녀이자 태조의 제5비인 신성왕태후(神成王太后) 김씨이다. 경종의 왕비인 헌정왕후(獻貞王后)가 과부가 되어 안종의 집 가까이 살고 있었는데, 두 사람이 정을 통하게 되었다. 이에 안종은 사수현[경상남도 사천]에 유배되어 그 곳에서 죽었고, 헌정왕후안종이 유배되던 날 아이[현종]을 낳고 죽었다. 홍경사는 1016년(현종 7)에 공사를 시작되어 1021년(현종 12)에 완성되었다.

[봉선 홍경사 사적 갈비와 홍경사의 창건 내력]

홍경사를 창건하게 된 내력은 현존하는 봉선 홍경사 사적 갈비에 적혀있다. 갈비는 머릿돌이나 지붕돌을 따로 얹지 않고 비 몸의 끝부분을 동그랗게 처리한 비를 말하는데, 홍경사 갈비는 거북 받침돌과 머릿돌을 모두 갖추고 있다. ‘봉선(奉先)’은 선(先)을 받든다는 뜻인데, 선은 고려 현종의 아버지 안종을 의미하므로, 이는 곧 안종의 뜻을 받들어 사찰을 조성했다는 것을 지칭한 것이다. 사적이란 오랜 기간에 걸쳐 있었던 일의 자취라는 뜻이니, 이 명칭은 안종의 뜻을 받들어 지은 홍경사의 창건 내력을 기록한 갈비라는 뜻이 된다. 비문은 1026년(현종 17)에 왕명으로 최충(崔冲)[984~1068년]이 찬술하였으며 백현례(白玄禮)가 글씨를 썼다.

이 비문에 의하면, 홍경사는 고려 현종 12년(1021)에 형긍(逈兢)이 왕의 명을 받아 여행자의 보호와 편의를 위하여 창건하였으며 수행을 위한 장소라기보다는 원(院)의 성격이 많았던 사찰로 홍경사 또는 홍경원이라고 하였다 한다. 홍경사가 세워진 곳은 직산현(稷山縣)성환역(成歡驛) 근처로 사람들의 통행이 많은 곳이었지만 여행자들의 숙소가 없고 강도들이 자주 출몰하던 곳이었다. 이에 홍경사는 불교적 목적 외에 여행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역할이 중요했고, 현종은 이러한 목적의 달성을 위하여 특별히 사찰 옆에 광연통화원(廣緣通化院)이라는 객관(客館)을 함께 짓도록 하였다. 당시 현종강민첨(姜民瞻)김맹(金猛) 등을 별감사(別監使)로 삼아 홍경원 신축을 함께 관리하게 하였는데 모두들 공치사나 교만한 마음을 품지 않았고, 인부를 사역할 때는 농사철을 피하였으며 물자도 국가의 창고에서 꺼내지 않았다고 한다. 기와장이는 기와를 대고 나무꾼은 목재를 공급하였고, 톱질과 자귀질은 일없는 목수들을 모아서 시키고, 괭이질이나 삽질은 놀고 있는 사람들이 달려와서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법당·불전·행랑 등 2백여 칸의 건물을 1016년부터 1021년까지 무려 5년간의 공사 끝에 완성하였고, 현종은 사액을 내려 봉선 홍경사(奉先弘慶寺)라 하였다. 원래 현종의 부왕인 안종(安宗)이 『법화경』의 묘설을 보고 깊이 감동하여 원찰(願刹)을 창사하려다가 서거하였으므로 부왕의 유지를 이어 받아 완성한 사찰이라고 하여 사찰 이름에다가 ‘봉선’을 덧붙여서 사액을 내렸다는 것이다. 이처럼 홍경사는 임금이 이름을 지어준 사액 사원이었다. 비문에서는 이러한 홍경사에 대해서 “[절의] 형세는 하늘에서 날아온 듯하였고, 불상을 모신 전각과 불경을 봉안한 누각 등은 아름답고 기이하여 마치 도솔천인 듯하였고, 오리 모양의 종과 기러기 모양의 탑은 웅장하고 엄숙하여서 멀리서 보면 [인도의] 나란타사처럼 보였는데, 이미 사찰이 크게 일어났으니 실로 천대를 이어 [이곳에서] 불법이 이어질 것”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홍경사의 발전과 문벌 귀족]

홍경사현종 때 창설된 후 계속해서 왕실과 문벌 귀족들의 비호를 받으며 직산 지역의 토호 세력으로서 막강한 경제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인종 때 문벌 귀족의 핵심 세력인 이자겸이 홍경원을 수리하게 하였는데 주현의 장정을 징발하여 그 폐해가 매우 컸다는 기록에서도 그런 사실을 살필 수 있다. 이자겸이 이처럼 말년에 홍경원 수리를 한 것은 집안사람들이 모두 금산사, 현화사, 법천사 등 법상종 세력과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인주 이씨 집안과 법상종 사찰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또한 1130년(인종 8) 8월에 묘청의 말을 따라 이 절에서 아타파구위대장군이 말한 다라니를 외워 재난을 물리치기를 기원하는 법회인 아타파구신도량(阿吒波拘神道場)을 27일 동안 개최하기도 하였다는 기록을 통하여서도 이 절이 당시 중앙의 문벌 귀족 사회 동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고려 성종 대를 전후하여 경주계 유신(儒臣)이 졸몰(卒歿)하였고, 현종 대 이후에는 최충(崔冲)을 구심점으로 한 비경주계(非慶州系)의 새 유신들이 개경과 근기 지방의 여러 읍(近畿諸邑)에 포열(布列)하였다. 특히 해동 공자(海東孔子)라는 칭송을 들은 최충은 1005년(목종 8)의 과거에서 장원으로 급제한 인재로서 덕종~문종 연간에 걸쳐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위치에 있었지만 치사(致仕)한 후에는 문헌공도(文憲公徒)라고 불린 사학(私學)을 연 것으로 더욱 유명하다. 최충이 1026년에 세워진 봉선 홍경사 갈기(奉先弘慶寺碣記)[국보 제7호]를 왕명을 받들어 짓고 있는 데서도 당시 문벌 귀족 사회의 동향 속에서 홍경사의 위치를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홍경사의 쇠퇴]

고려 중엽에 들어서면 중앙의 문벌 귀족 사회는 커다란 변동이 일어난다. 이 시기 지방에서 대규모 농민 유망이 일어나는 한편, 중앙에서는 지배층의 심각한 분열 현상이 나타났다. 당시 지배층의 분열 현상은 지배층 사이에 국가적인 위기의식의 광범한 확산과 함께 지배 세력의 보수화·파당화 경향으로 나타났다. 정치 세력들은 현실적인 이해관계에 기초한 족당(族黨)·당여(黨與)라는 형태로서 결집하여 주요 정치 사안에 따라 이합집산이 심각한 보수화·파당화 경향을 드러내었다.

결국 그러한 경향은 헌종을 옹립한 이자의(李資義) 세력을 누르고 왕위에 오른 숙종의 쿠데타, 이자겸(李資謙)의 난, 묘청(妙淸)의 난 등 일련의 정치적 변동으로 표면화되었다. 이는 12세기 초 표면화되기 시작한 농민층의 대규모 유망 현상에 대해 지배층이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데 따른 것이었다. 이상과 같이 12세기 초 이래 나타나기 시작한 상부구조의 정치적 분열과 하부구조의 유망 현상에 고려 사회가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이는 12세기 후반에는 각각 무인 정변과 농민 항쟁이라는 미증유의 사회 변동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1177년(명종 7) 3월에는 망이·망소이 등이 홍경사를 불태우고 승려 10인을 죽이는 사건이 벌어지게 된 것이었다. 따라서 홍경사는 고려 문벌 귀족 사회의 수혜를 받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 모순으로 말미암아 전국적으로 민란이 일어났을 때 그 피해의 중심에 있기도 하였다 할 수 있다.

이후 홍경사는 억불숭유의 조선 초기에 철폐되고 원(院)만이 남아 홍경원이라고 불리었다. 현재 그 터에는 국보 제7호로 지정된 봉선 홍경사 사적 갈비(奉先弘慶寺事蹟碣碑)만이 남아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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