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1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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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以僑 |
이칭/별칭 | 자미(子美),만취당(晩翠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순홍 |
[정의]
조선 전기에 활동한 경상북도 영천 지역 출신의 문인.
[가계]
정이교(鄭以僑)의 본관은 영일. 자는 자미(子美), 호는 만취당(晩翠堂)이며, 1498년(연산군 4) 12월 15일 세상을 떠났다. 고려 한림학사(翰林學士)이며 추밀원 지주사(樞密院知奏事) 정습명(鄭襲明)을 시조로 하며, 고조는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 판서(工曹判書) 정광후(鄭光厚)인데 이때부터 영천 전촌(錢村)에 옮겨 살았다.
증조는 사정(司正) 정위(鄭瑋)이고, 조부는 영산유학교도(靈山儒學敎導) 정문예(鄭文裔)이다. 아버지는 사성(司成) 정종소(鄭從韶)이며, 어머니 숙인(淑人) 윤씨(尹氏)는 부윤(府尹) 윤통(尹統)의 딸이다.
부인 화순 최씨(和順崔氏)는 우후(虞侯) 최한백(崔漢伯)의 딸로, 슬하에 5남 2녀를 두니 아들은 서윤(庶尹) 정공징(鄭公徵), 사복(司僕) 정공건(鄭公虔), 군수(郡守) 정공필(鄭公弼), 현감(縣監) 정공청(鄭公淸), 참봉(參奉) 정공예(鄭公藝)이고, 사위는 현감(縣監) 유무빈(柳茂濱)과 현감(縣監) 이달수(李達修)이다.
[활동 사항]
정이교는 1470년(성종 원년)에 문과 별시에 급제하고, 이어 1486년(성종 17)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한림(翰林)·전랑(銓郞)·삼사(三司)를 두루 거쳐 홍문관 교리(弘文館郊理)·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정이교는 지나치게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인해 오히려 강등되어 고을로 좌천되었다.
[묘소]
정이교의 묘소는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 태화리 태평산(太平山)에 있으며, 현손 정유번(鄭維藩)의 갈문(碣文)이 남아 있다.
[상훈과 추모]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에 후손들에 의해 세워진 봉암서당(鳳巖書堂)과 묘재인 비한재(匪寒齋)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