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09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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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土器 |
영어공식명칭 | Potter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선사,고대 |
집필자 | 이정민 |
[정의]
광주광역시에서 출토된 흙으로 빚어 불에 구워 만든 그릇.
[개설]
토기는 흙을 개어 빚은 후 불에 구워서 만든 그릇으로 신석기시대 이래로 사용되었다. 보통 500℃~1,000℃ 이하에서 구워지며 그 이상에서 구워진 것은 도기(陶器)로 구분되는데, 단단한 정도에 따라 연질과 경질로 구분된다. 일반적으로 통일신라시대 이후에 나오는 유약을 바른 자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토기에 포함된다.
토기는 식량을 저장하거나 담는 데 사용한 것으로 정착생활과 농경의 시작을 보여 준다. 토기는 수확한 생산품을 저장·운반·조리하는 도구로서 인간이 섭취할 먹거리의 종류를 다양하게 하고 활동 공간을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선사시대에는 토기의 질이 동일하였으나 고대에는 바탕흙과 가마 구조, 소성 온도의 차이에 따라 토기의 종류가 다양해지는데 용도와 기능이 분화된 결과이다. 일상 토기는 운반용·저장용·가공용·조리용·식기·벼루·등잔 등으로 구분되고, 제의용 토기는 제례의식용·공헌용·부장용·매장용으로 구분된다.
[변천]
신석기시대의 토기는 노대동 유적 수혈·집석 유구에서 확인되었다. 신석기시대 후기에 속하는 격자문·원형점열문(圓形點列文)이 시문된 토기와 무문양의 이중구연토기(二重口緣土器), 신석기시대 말기에 속하는 사단선문과 횡단선문이 시문된 이중구연토기가 출토되었다.
청동기시대의 토기는 주거지, 수혈, 도랑 모양의 유구[구상유구(溝狀遺構)], 고인돌, 돌널무덤[석관묘(石棺墓)], 널무덤[토광묘(土壙墓)] 등에서 확인된다. 토기는 확인되는 유구 수에 비하여 수량이 적은 편인데 대부분 조각으로 확인되고 있다. 특히 고인돌 등 매장 유구에서는 저부편(底部片)이나 동체부 조각만 출토되고 있다.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토기들은 수문·산정동·동림동·용두동·덕림동 을림·입암동·복룡동·하산동 유적 등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중구연단사선문토기·구순각목문토기·공열토기 등이 출토되고 있어 전국적으로 보았을 때 가락동식과 역삼동·흔암리식에 속한다. 대표적인 청동기시대 토기라고 할 수 있는 민무늬토기인 송국리형 토기는 대부분 송국리형 주거지에서 확인되고 있다. 송국리형 주거지는 송암동·외촌·성덕·장자·신완·산정·기용·하남동·금곡·노대동·평동·용두동·덕남동 등지에서 확인되었다. 출토된 토기는 주로 발형이며 일부 호형도 있다.
초기철기시대~원삼국시대의 토기는 주거지·수혈·토광묘 등에서 확인되는데 덧띠토기[점토대토기(粘土帶土器)]와 경질무문토기가 대표적이다. 덧띠토기는 원형과 삼각형으로 구분되는데 삼각형이 원형보다 늦게 나타난다. 관동·수문·오룡동·신창동·용두동·신촌·평동·월전동 하선 유적 등에서 확인되고 있는데 특히 수혈 유구에서는 원형과 삼각형이 함께 출토되기도 한다. 대형의 덧띠토기 옹은 옹관묘(甕棺墓)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삼각형 덧띠토기 단계가 되면 발형토기뿐 아니라 뚜껑·고배·시루 등 다양한 기종들이 출현한다. 검은간토기[흑색마연토기(黑色磨硏土器)]는 대부분 긴목항아리[장경호(長頸壺)]로 신촌·수문·신창동·평동 유적에서 확인되었다. 그 외에도 토기의 표면에 옻칠한 도태토기(陶胎土器)가 있는데 신창동 유적에서 확인되었다. 또한 신창동 유적에서는 낙랑계 옹편과 야요이계 토기편 등이 출토되어 다양한 지역과의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세기를 전후한 시점부터는 삼국시대 토기로 볼 수 있다. 삼국시대 토기는 격자문과 집선문의 연질·경질 타날문토기(打捺文土器)가 대표적이지만 일부 회색민무늬토기도 확인된다. 주거지·방형 및 지상 건물지·수혈·도랑 모양의 유구·가마 등 생활 유구뿐 아니라 옹관묘·널무덤·분구묘(墳丘墓) 등 분묘 유구에서 폭넓게 확인되고 있다. 대표적인 기종으로는 생활 유구에서 원저단경호(圓底短頸壺)·이중구연호(二重口緣壺)·양이부호(兩耳附壺)·평저호(平底壺)·심발(深鉢)·장란형토기(長卵形土器)·시루·옹 등, 분묘 유구에서 원저단경호·평저호·양이부호·개배·고배·기대·분주 토기 등이 있다. 6세기 중엽까지는 다양한 기종과 형식이 확인되지만 그 이후에는 신부가 낮은 개배, 병 등으로 단일화되는 양상이 확인되고 있다.
광주광역시를 포함한 영산강 유역권은 마한 토기의 특색을 바탕으로 영산강 양식 토기 문화를 형성하였다. 범마한 토기라고 할 수 있는 이중구연호·양이부호는 3세기부터 6세기 전후한 시기까지 다양한 유구에서 출토되며, 조형토기는 선암동·오선동 등 주로 생활 유구에서 확인되고 있다. 검은간토기는 서해안 지역 출토품과 비교해 볼 수 있는데 용곡B 5호분 1호 토광에서 출토되었다. 5세기 중·후반부터는 개배·고배·기대 등으로 대표되는 백제계 토기가 등장하며 6세기부터는 삼족배·병 등이 확인되고 있다. 월계동·명화동장고분은 5세기 후반~6세기 중반에 등장하는 장고분으로 주구에서 분주토기가 확인되었다. 그 외에도 영산강 유역에서 일반적으로 확인되는 영산강 양식 토기 및 타지역과의 교류를 살펴볼 수 있는 토기들이 확인되고 있다.
아라가야계 토기는 하남동·동림동·풍암동 유적에서 대부직구호·광구소호·파배·발형기대 등, 소가야계 토기는 동림동·신완·하남동 유적에서 파배·단추형꼭지 개배·점열문 시문 개배·발형기대·대부직구호·파수부배 등이 확인되었다. 대가야계 토기는 명화동·장수동 점등 유적에서 모자형꼭지 개·유개장경호·유개대부장경호·광구장경호 등이 확인되었다. 일본과의 교류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는 하지키계 토기[금곡B 1호 주거지]와 스에키계 토기[향등 주거지, 월계동장고분], 분주토기 등이 있다.
통일신라시대가 되면 신라 토기로 흡수 통일되는데 석실묘와 건물지 등에서 토기 조각들이 확인되고 있다. 석실묘는 산월동 뚝뫼·용두동 등, 건물지는 누문동·덕남동 등에서 확인되었다. 출토되는 토기는 도장무늬 토기[인화문토기(印花紋土器)]·주름무늬병·유개합 등이 대표적이다.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유약을 바르지 않고 자기(磁器)보다 소성 온도가 낮은 도기류가 일상 용기로 사용되었다.
[의의와 평가]
토기는 선사·고대인에게 있어 생활의 기본적인 도구이자 현재 인류에게 있어서는 과거 사회 복원의 기초 자료가 된다. 토기는 출토량이 많아 지역의 문화 흐름을 이해하는 기본 토대가 되는 시기 구분 설정의 제1자료로 활용된다. 이를 바탕으로 시기 구분, 제작 기법을 통한 문화적 계보, 유구의 성격 규명, 교류 관계 등을 살펴볼 수 있다.
광주광역시에서는 선사시대부터 고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구에서 많은 토기가 확인되었다. 출토된 토기는 유적의 입지, 주거와 관련된 일상생활, 각종 제의 등의 생활상, 매장과 관련되는 생사관, 다른 지역과의 교류 관계까지도 살펴볼 수 있는 바탕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