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5078
한자 光州市民社會-
영어공식명칭 Gwangju YMCA and Gwangju YWCA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신재식

[정의]

개신교 단체로 광주를 대표하는 시민사회단체.

[개설]

광주YMCA광주YWCA는 광주광역시의 대표적인 시민사회단체이다. 2021년 기준 광주YMCA는 창립 100주년을 기념한 지 1년이 지났으며, 광주YWCA는 창립 100주년을 1년 앞두고 있다. 광주YMCA광주YWCA는 설립 이래 광주 지역에 기독교 복음뿐만 아니라 근대문화와 정신을 확산시키면서 광주 시민사회를 이끌어왔다.

[창립부터 해방까지]

광주YMCA는 1920년 7월 29일 전라도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에 있는 오웬기념각에서 창립되었다. 당시 광주의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의 지도자였던 최흥종 목사를 비롯해 30여 명의 기독교 청년들이 함께하였다. 광주제중병원 직원과 광주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의 직원들이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초대 회장에는 광주숭일학교 교사였던 20대 청년 최병준이, 총무에는 광주 3.1운동의 주역이었던 독립운동가 김철이 선임되었다.

광주YMCA가 창립되기 전에 이미 광주에는 학생YMCA 활동이 있었다. 1911년에 광주숭일학교에 학생YMCA가 조직되었다. 광주숭일학교는 1908년 유진 벨(Rev. Eugene Bell) 선교사가 광주남학교로 개교한 학교였다. 광주숭일학교YMCA가 활동하던 당시 서울에서 이상재, 김필수, 신흥우가 광주YMCA 설립을 지원하기 위해서 광주에 왔다. 광주 기독교계 청년들이 적극 협력하고, 3.1운동에 참여했던 민족주의 청년들이 대거 합류해서 광주YMCA가 창립되었다.

1924년 광주YMCA최흥종 목사가 3대 회장이 되고, 최영균이 총무가 되어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의 인준을 받았다. 광주YMCA최흥종 목사가 시무하던 북문밖교회의 유치원에 간판을 달았다. 초창기 주요 사업은 지덕체 운동을 목표로 했으며, 하기순회전도대회를 실시하고, 광주유치원을 개원하고, 서북여자야학을 개학하고, 광주숭일학교에서 노동야학을 개시했으며, 농촌사업을 시작하였다. 당시에 회관이 없어 북문밖교회나 오웬기념각, 흥학관, 숭일학교공업부과 체육관, 유치원, 부동교 건너편 녹성구락부 등을 활용하였다.

1933년 고든 어비슨(Gordon Avison) 선교사의 집[현재 백운동]에 농촌지도자 양성을 위한 광주YMCA농업실습학교를 세웠다. 1931년에 소년척후대[현재 보이스카우트]를 조직하고, 1932년에 충장로 5가[현재 광주극장 옆]에 최초의 회관인 충장로회관[수기동회관]을 마련하였다. 당시 체육부 활동을 강화하여 유도, 역도, 기계체조 등을 보급하면서 근대체육 운동을 전개하였다. 광주YMCA는 1938년에 조선기독교청년회가 일본기독교청년회 산하에 예속되면서 모든 활동이 중단되었으며, 1944년 12월에 자진 폐회하였다.

광주YMCA는 창립 이후부터 일제의 탄압으로 자진 폐회할 때까지 광주의 정신과 문화 경제, 사회의 발전을 위해 선도적 역할을 했으며, 회원 대부분이 3.1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일제로부터 고초를 겪었으며 그 후로도 계속 민족운동에 참여하였다.

광주YWCA는 1922년 여름에 김필례, 양응도, 김함라, 임자혜가 양림리 김필례의 집에 모이면서 시작하였다. 당시 김필례는 김활란, 유각경과 함께 1922년 3월 서울에서 한국YWCA 발기회를 열고 조직을 결의한 후, 여름에 광주에 머물면서 광주YWCA의 조직을 시작하였다. 광주YWCA의 초대 회장에 양응도와 초대 총무에 김필례가 취임하였다.

광주YWCA가 창립된 초기에 광주 지역에서는 광주YMCA와 함께 행사를 갖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광주YMCA광주YWCA의 핵심 인물들이 부부나 친인척이었으며,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인 광주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에서 가르치거나, 같은 교회에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광주YWCA의 초대 회장인 양응도는 당시 광주 금정교회에 시무하던 김창국 목사와 부부이며, 김필례와 사돈지간이고 정신여학교 동문이었다. YWCA 연합회의 순회총무이면서 광주YWCA 창설자인 김필례는 금정교회 여성조력회[여전도회] 회장을 맡고 있었으며, 최영욱과 부부였다. 의사인 최영욱광주YMCA 창설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최흥종 목사의 동생이었다. 김필례는 1947년 서울로 이주하기 전까지 광주 여성사회를 이끌면서, 신사참배와 창씨개명 문제로 일제에 고초를 당하였다. 김함라는 김필례의 조카딸로 1908년 수피아여학교 개교와 함께 최초의 한국인 정식 교사로 부임했으며, 금정교회 2대 목사인 남궁혁과 부부였다. 임자혜는 3.1운동 당시 북문안교회 교인을 이끌고 참여하였던 광주숭일학교 교사 김강 장로와 부부였다. 임자혜는 남편이 3.1운동으로 수감되어 있는 동안 광주YWCA 창립 일을 거들었으며, 광주유치원 보모로 있으면서 김필례가 도미 후 야학까지 맡아 광주YWCA의 실질적인 일꾼 역할을 하였다.

광주YWCA는 창립 이후 광주 지역에서 여성들을 위해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사회봉사와 성인교육, 계몽활동에 주력하였다. 1923년에 한글을 익히지 못한 여성들을 위해 야학반을 개설하였다. 초기 야학은 광주YWCA광주YMCA가 함께 운영하였다. 야학 장소로 이용된 홍학관은 3.1운동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모임 장소였으며, 일제의 농민 수탈에 저항한 농민들의 쟁의 장소로 이용되었고, 노동공제회와 신간회 지부가 함께 사용하던 곳이었다. 야학반에는 100명에서 300명까지 연령 제한 없이 다양한 배경의 여성들이 함께 모여 한글, 산수, 음악, 성경을 주로 배웠다. 야학에서는 여성들에게 읽고 쓰기를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요리법, 염색법, 재봉 등을 소개했으며, 새로운 문화와 합리적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새생활교육을 실시하였다. 1938년 일제에 의해 광주YWCA가 폐쇄될 때까지 운영되었다.

광주YWCA 활동은 학생YWCA 운동으로 이어졌다. 수피아여학교의 교사들과 학생들은 모두 YWCA 회원이 되었으며, 수피아여학교YWCA는 1923년 제2회 YMCAYWCA의 합동하령회에 참여하였다. 수피아여학교YWCA는 학교 문화행사와 체육행사를 맡아 진행하고 벽신문을 제작하였다. 1926년 한국YWCA가 농촌사업을 시작하면서 광주YWCA도 광주 인근과 제주도에 하기학교를 개설했는데 수피아여학교YWCA 학생회원들이 주로 활약하였다. 또한 동경 체육전문학교를 졸업한 김복숙[광주YWCA 제2대 회장], 조경순[광주YWCA 제4대 회장]이 수피아여학교에 체육교사로 부임해서 다양한 체육활동을 장려하고 보급하였으며, 광주YWCA는 1930년부터 호남여성농구대회를 주최하고 체조강습회 개최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이렇게 여성의 능력과 자각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던 광주YWCA는 일제 탄압에 의해 1938년 강제 폐쇄되었다.

[해방 이후부터 1970년대까지]

광주YMCA광주YWCA는 광복 이후 광주 지역의 시민사회 형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광주YMCA는 1945년 9월 금정교회에서 재건 총회를 개최하고 회장에 최흥종 목사와 부회장에 백영흠 목사를 선임하고 총무에 정인세를 선출하였다. 이후 모든 활동을 재개하고 청소년 지덕체 운동과 농촌운동, 일요강좌와 영어강좌 등을 실시하였다. 1945년 황금동회관을 마련하고 시민강좌, 각종 문화집회, 학생소년사업, 영어강좌 등을 개설하였다.

1964년에 개관한 금남로회관은 청소년교육과 시민문화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광주YMCA는 산업화 시대인 1970년대 군부독재가 인권을 탄압하던 상황에서 광주 시민사회 운동의 주축 역할을 하였다. 당시 전국YMCA는 개발 혜택에서 소외된 서민층의 복리 향상, 시민 동참의 민주주의적 사회건설을 목적으로 사회개발사업 프로그램을 추진하면서, 시민의식 개발과 지역사회 조직화, 민중·민주화 사업을 실시하였다.

광주YMCA도 이 흐름 속에서 시민논단을 비롯해 성서연구, 신학강좌, 십대의 광장, 광천동 사회개발 같은 이념교육과 청년클럽의 활성화,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을 개설하면서 시민의 참여를 확대하였다. 시민논단은 1971년에 개설된 이래 1980년대 말까지 79회에 걸쳐 전통을 이어갔다. 시민논단은 모든 사회문제를 포괄해서 다루었으며 강원룡, 안병무, 문익환, 김동길, 한완상, 송건호, 이문영, 김지하 등이 초대되었다. 이렇게 1970년대에 광주YMCA는 교육과 집회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군부독재와 산업화로 나타난 여러 사회문제에 대한 토론과 해결 방안을 협의하면서 시민과 함께하는 시민운동의 지평을 확장하였다.

광주YWCA는 1945년 광복과 함께 광주 금정교회 부속유치원에서 재건 총회를 열어, 회장에 김정현, 서기에 조아라, 총무에 김필례를 선임하였다. 광주YWCA성빈여사를 설립해서 15세 전후의 전쟁고아 소녀들을 돌보았으며, 성빈여사에 있는 고아들의 교육을 위해 3년제 야간중학교인 호남여숙을 개설하고 복지와 교육 사업을 동시에 추진하였다.

이후 광주YWCA는 여성 교육을 통해 여성 지도력 개발과 양성 평등 분야에 큰 역할을 해왔다. 1960년에 대의동회관을 신축하고 여성의 의식개혁과, 소외계층 보호 봉사와 사회정화까지 여성사회단체로 폭넓은 활동을 하였다. 광주계명여사를 설립하여 농촌 출신 어린 여성들과 빈민 여성을 보호하고 구제하면서 직업기술전문교육을 실시하였다. 또한 한글을 깨치지 못한 농촌 여성을 위해 야학반 별빛학원을 개설하였다.

1970년대 광주YWCA는 세계YWCA가 기독교운동과 사회봉사로 방향을 전환한 것에 발맞춰 기독교 신앙 강화와 사회운동체로서 자각과 책임을 강조하였다. 이를 위해 농촌계몽운동과 저소득 근로여성 문제 등 사회복지사업을 강화하고, 신용협동조합운동을 통해 영세민과 YWCA운동을 결합하였다. 더불어 경제성장으로 인해 국민 소비 수준이 높아지면서 소비자 보호는 인권운동이라는 인식 아래 소비자운동을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광주YWCA는 시민강좌를 개설해 여성의 능력을 사회정의 실현에 두고 이를 실천하는 데로 확장하였다. 광주YWCA는 민족의 주체로서 민중의 역할에 대한 교육을 위해 1978년 민중논단을 개설하였다. 서남동, 한완상, 문동환, 이의정, 최열 등이 강사로 초빙된 민중논단은 광주의 대표적인 대중적 시민사회강좌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1970년대 시민논단과 민중논단을 비롯해서 광주YMCA광주YWCA의 여러 활동은 광주 시민사회를 확장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런 활동들은 1980년 5.18민주화운동에서 보여 준 광주시민의 독재정권 타도와 민주화를 위한 구체적인 원동력이 되었다.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광주의 1980년대는 5.18민주화운동과 더불어 군부독재에 항거하는 민주화운동이 이어졌다. 광주YMCA5.18민주화운동으로 젊은 회원들과 지도자들이 고통을 겪었다. 이영생, 명노근, 김천배, 윤영규, 강신석, 이기홍 등 당시 이사와 이성학 전 총무를 비롯해서 젊은 청년 회원들의 투옥되고 수배되었다.

군사정권의 탄압 가운데서도 1982년 광주YMCA중등교사협의회를 조직하여 학교교육, 청소년운동의 올바른 방향 설정과 교육자들의 자질 향상을 추구하였다. 1986년 교육민주화선언을 발표하고 민주교육실천대회를 개최하면서 시민운동으로서 교육운동을 조직하고 대중화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또한 시민논단과 더불어 시민학당을 개설하여 시민을 위한 사회교육 강좌를 진행하였다. 이만열, 문병란, 송기숙, 황석영, 김준태, 최용섭, 문순태 등이 강사로 초대되었다.

광주YMCA는 1986년부터 시민중계실을 출범하여 시민권익을 옹호하는 소비자운동을 시작하였으며, 시민사회의 화두인 지역주민운동, 여성운동, 환경운동, 통일운동, 노동운동, 교육민주화운동, 언론민주화운동, 공정선거실천운동 등의 활동을 통하여 시민 권익 향상 운동을 확장하였다. 1988년에는 광주YMCA 안에 평화통일연구위원회를 설치해 통일 전반에 관한 자료 수집과 강연, 협의회 등을 시작하였다.

1990년대 들어 광주YMCA 활동은 민주화와 민족통일 문제와 더불어 참여민주주의와 지방자치제에 관심을 갖고 다양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또한 1990년대 들어 광주YMCA5.18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5.18 영상기록특별위원회를 발족하고 2년에 걸쳐 500명을 채록하였다. 이후에도 5.18민주화운동과 희생자 권리 회복을 위해 지속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0년 창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광주YMCA는 창조적 지구시민 육성, 시민사회의 성숙과 확장, 공생과 통일시대 지향, 지구촌 공동체 운동의 참여 등 100주년을 향한 광주YMCA 운동의 이념과 좌를표 재정립하였다.

광주YWCA는 1980년대 들어서도 지속적으로 사회참여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다. 광주YWCA의 대의동회관은 국제 엠네스티 광주지부와 여러 시민단체들이 있는 시민운동과 문화 활동의 중심지였다. 5.18광주민주화운동 때 대의동회관에서 현수막, 대자보 제작, 모금, 취사 등이 이루어졌으며 회관은 시민의 일터 역할을 하였다. 전라남도 도청과 함께 시민항쟁의 주요 활동 장소였기 때문에, 대의동회관은 계엄군의 무차별 공격과 약탈로 폐허가 되었다. 당시 조아라 회장과 이애신 총무, 김경천 간사 등을 비롯한 회원들이 신군부에 의해 구속되거나 수배되었다. 대의동회관은 철거 직전까지 신군부의 탄압 속에서 5.18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된 행사를 열었다.

광주YWCA는 1985년 유동회관으로 이전하면서 민주화운동단체들과 사회문화 전반에 걸친 정의평화사회 건설을 위한 시민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광주YWCA는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창조적 교육, 평화통일, 자립경제, 환경보존 등과 관련된 활동을 강화하였다. 시국과 나라를 위한 기도회, 광주기독교여성대회, 공정선거 감시활동, 민중논단 개최 등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평화운동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1986년에 제도교육에서 소외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Y야학을 운영하였다.

1990년대 지방자치제도가 시작되면서 광주YWCA는 여성의 정치참여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여성정치 후보자 발굴과 육성, 공정선거 감시로 바른 선거풍토 확립, 의정감시 활동을 펼치면서 지방화 시대에 여성이 정치의 주체로 나서도록 유도하였다. 1995년 Y시민포럼을 개설하였으며, 1996년 2회부터 광주 5월 문제를 주제로 진행하였고 1998년에는 명칭도 오월Y시민포럼으로 바꾸었다.

2000년대 들어 광주YWCA는 양성평등 문화를 확산하고 건강한 생활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바른 먹거리를 위한 소비자운동, 환경보전 소비자운동, 생태계 지킴이 활동 등 생활협동조합운동도 지속적으로 펼쳐 여성들이 생명살림을 실천함으로써 사회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또한, 새터민 여성, 국제결혼으로 유입된 이주여성들에게 교육프로그램을 펼쳐 인권과 생활정착을 위한 활동을 하였다. 더 나아가 시민사회단체로서의 활동과 역할의 범위를 광주 지역을 넘어 북한 어린이를 비롯해 재외동포까지 확장하였다.

[의의 및 평가]

광주YMCA광주YWCA는 1920년대 창립 이래 교육과 다양한 활동을 통하여 광주 시민사회를 이끌어온 대표적인 시민단체이다. 이 두 단체는 광주 지역에서 계몽운동, 민족운동, 농촌운동, 청소년운동, 민족문화운동, 민주화운동, 시민사회운동 등 여러 분야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을, 1970년대와 1980년대의 군부독재 정권에서는 민주화와 인권운동을, 1990년대 이후 생태와 환경운동, 통일운동, 시민사회운동으로 활동 영역을 확장해 왔다.

광주YMCA의 시민논단과 시민학당, 광주YWCA의 민중논단과 오월Y시민포럼 등의 시민사회강좌 프로그램은 시민의식의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두 단체 모두 5.18민주화운동 당시 핵심적인 활동 공간이었으며, 지도부와 회원 다수가 수배되고 투옥당하는 고통을 겪었다. 현재까지도 5.18민주화운동을 바로 알리고 이 운동의 정신을 확산하는 데 많은 역할을 하고 있다. 2020년 창립 100주년을 맞은 광주YMCA와, 2022년 창립 100주년을 맞는 광주YWCA는 지난 100년 동안 광주 시민사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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