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남군의 어린시절」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4478
한자 錦南君-時節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광주광역시 동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송기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수록|간행 시기/일시 1981년 - 「금남군의 어린시절」 광산군지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광산군지』에 수록
수록|간행 시기/일시 1985년 - 「금남군의 어린시절」 광주시에서 간행한 『광주시사』에 수록
수록|간행 시기/일시 1990년 - 「금남군의 어린시절」 광주직할시에서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금남군의 어린시절(1) (2) (3)」으로 수록
성격 설화|인물전설
주요 등장 인물 정충신|정금남|권율|이항복
모티프 유형 비범한 인물의 어린 시절

[정의]

광주광역시에서 전해 내려오는 조선 중기 선조 때의 공신 정충신의 비범한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

[개설]

조선 후기 인조(仁祖)[재위 1623~1649] 때의 공신인 정충신(鄭忠信)[1576~1636]의 어린 시절의 비범함을 알 수 있는 세 가지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들은 당시 광주목사이던 권율 장군과 관련되어 있다.

[채록/수집 상황]

1981년에 광산군지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광산군지』에 수록되어 있다.

1985년에 광주시에서 간행한 『광주시사』에 수록되어 있다.

1990년에 광주직할시에서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정충신은 조선 선조(宣祖)[재위 1567~1608] 때의 충신으로 고려 말 명장 경열공(景烈公) 정지(鄭地) 장군의 7대손이다. 정충신이 어렸을 때 임진왜란이 발생하였다. 전라도 광주에서 조정으로 상소문을 전달할 사람이 없었는데, 어린 정충신이 나섰다. 주위 사람들이 말렸으나 권율(權慄)[1537~1599] 장군은 비범함을 알아보고 믿고 맡겼다. 어린 정충신은 상소문을 담뱃대 속에 말아 넣는 지혜를 발휘하여 들키지 않고 전달하였다.

정충신은 어려서부터 영민해 당시 광주목사인 권율 장군의 통인(通引)으로 있었다. 하루는 권율 목사가 여섯 살 정충신의 지혜를 시험하고 싶었다. 권율 목사는 덧문을 아래에서 위로 높이 올려 처마 밑에 걸어두고 문짝 위에 물을 가득 담은 그릇을 두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급히 문을 내리면 쏟아지는 물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다음 권율 장군은 정충신을 불러 비가 와서 날이 쌀쌀하니 덧문을 내려 닫으라고 하였다.

정충신은 이 말을 듣자마자 바로 덧문을 닫지 않고, 광으로 가서 나무 의자와 대막대를 가져왔다. 차분하게 발판을 마루에 놓고 대막대로 문짝 위를 훑어서 물그릇이 걸리자 조심히 물그릇을 내려놓고 덧문을 내려 닫았다. 권율 장군은 이 광경을 목격하고 정충신의 비범함을 알아보았다.

얼마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은 난을 피해 의주로 몽진(蒙塵)하였다. 각 전선에서의 보고가 두절되었고, 권율 목사도 장계를 올리지 못해 걱정이 컸다. 이때 정충신권율 목사에게 자신을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권율 목사는 깊이 생각하다가 정충신이 어리지만 영민하기에 믿고 맡길 만하다고 생각해 장계를 써서 정충신에게 건네주었다. 다음날 권율 목사는 길을 떠나는 정충신의 행색을 보고 매우 놀랐다. 장계는 지니고 있지 않고, 더벅머리 땔나무꾼 행색에 망태기를 메고 있었다. 정충신은 의아해 하는 권율 목사에게 메고 있는 망태기가 장계라고 하였다. 그리고 장계를 그대로 지니고 무사히 적진을 통과하기는 어렵기에 장계를 길게 찢어 새끼를 꼬아 망태기로 엮었다고 하였다. 권율 목사는 정충신의 기지에 매우 놀랐다.

정충신은 무사히 적진을 뚫고 도착하여 장계를 순서대로 다시 펴서 이항복(李恒福)[1556~1618]에게 전달하였다. 이항복은 어린 정충신의 비범함과 용기를 알아보고 거두어 들였다. 정충신은 이곳에서 학문과 무예를 닦으며 장유(張維)와 최명길(崔鳴吉) 등과 친교를 맺었고 얼마 후 무과에 급제하였다. 정충신은 광해군 때 청나라에 잠입하여 적정(敵情)을 탐지하였고, 인조 때는 이괄의 난을 평정하여 진무공신으로 사호(賜號)를 받고 금남군(錦南君)에 봉해졌다.

또 다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권율 장군이 전라도 광주목사로 있을 때의 일이다. 권율 장군은 호남 각지에서 왜적을 대파한 승첩보와 호남의 정세를 선조가 몽진(蒙塵)하였던 의주(義州)의 행재소(行在所)[왕이 상주하는 궁궐을 떠나 거둥할 때 임시로 머무르는 행궁]에 알려야 했는데, 왜적이 가득하여 장계를 전할 길이 없었다. 이때 나이 어린 정충신이 사자(使者)를 자청하고 나섰다. 때는 삼복 한더위로, 민첩하고 지략이 있는 정충신은 온몸에 옻칠을 발라 나병 환자로 가장을 하였다. 그리고 장계를 가늘게 노끈으로 꼬아 배낭을 만들어 걸인 행색을 하고 길을 떠났다.

천품(天稟)이 영민한 정충신은 적진을 피해 가다가도 정탐을 위해 일부러 적진을 찾아들어가기도 하며 밤낮으로 의주를 향해 갔다. 정충신은 무사히 행궁에 도착하였고 메고 간 배낭을 풀어 장계를 원상태로 만들어 왕에게 전달하였다. 병조판서 이항복이 정충신의 비범함을 한눈에 알아보고 정충신을 자신의 집에 머무르게 하며 손수 글을 가르쳤다. 이항복은 정충신에 대해 만약 칼을 버리고 책을 취하면 훌륭한 명사가 될 것이라 하였다. 그해 겨울 정충신은 무과에 급제하였고, 이괄의 난 때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후에는 경상도병마절도사를 지내는 등 훌륭한 명신이 되었다.

[모티프 분석]

비범한 인물의 어린 시절을 당대의 유명 인물이 미리 알아보고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는 인물전설이다. 당대의 유명한 인물이 어린 아이를 시험하거나 우연한 사건을 목격하여, 그 지혜로움과 비범함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어린 인물은 후에 나라에 큰 공을 세우거나 큰 학자가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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