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83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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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 遺墟碑 |
영어공식명칭 | Galmi Yuheobi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서구 성서서로 195[갈산동 390-1]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신현정 |
건립 시기/일시 | 1996년 - 갈미 유허비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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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재지 | 갈미 유허비 - 대구광역시 달서구 성서서로 195[갈산동 390-1] |
성격 | 유허비 |
재질 | 석재 |
[정의]
대구광역시 달서구 갈산동에 있는 유허비.
[개설]
갈미 유허비는 1996년에 세워진 유허비이다. 유허비는 사라진 마을과 선인들의 자취를 기리고자 세운 비를 말하는데, 마을의 흔적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곳은 유래비로 이름이 붙여졌고, 갈미처럼 마을이 완전히 사라진 곳은 유적비 또는 유허비로 이름이 붙여졌다.
갈미는 대구광역시 달서구 갈산동(葛山洞)을 일컫는 지명인데, 지명과 관련하여서는 뒷산에 칡나무가 많다는 뜻의 ‘칠뫼’가 ‘갈뫼’로 불리다가 ‘갈산’이 되었다는 설과 ‘가을산’에서 ‘갈뫼’를 거쳐 ‘갈미’가 되었다는 설이 전하여 오고 있다. 갈미 유허비에는 떡갈나무가 많이 자란다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갈산동은 17세기 초반에 동래정씨(東萊鄭氏)가 처음 정착하였고 김해허씨(金海許氏) 등 여러 성씨가 모여 갈미마을을 이루었다. 1988년 대구직할시 서구에서 떨어져 나와 새로 생긴 달서구에 편입되었고, 1995년 대구광역시 달서구 갈산동이 되었다. 갈산동에는 남쪽·굼쪽·말랭이 등의 자연마을과 앞갓·큰갓 등의 야산, 솟탕샘·지욱샘 등의 샘, 귀낙골·먹뱅이·망정·점터 등의 고개, 시시골, 앞벌 등의 지명이 전한다.
[건립 경위]
1984년에서 2012년까지 5차에 걸쳐 성서산업단지를 조성하면서 갈산동을 비롯한 성서 일대는 과거의 전형적인 농촌마을에서 공단과 관공서, 아파트 단지 중심의 신도시로 변화하였다. 성서 일대 마을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 마을이 공단에 편입되는 등의 이유로 마을의 해체, 변화, 이주 등을 겪으면서, 옛 마을을 기리는 마음에서 마을 유래비를 세우기 시작하였는데, 1992년 망정부락 유적비를 시작으로 신당동 유래비, 갈미 유허비, 선원마을 유래비, 사령봉 유래비 등 열 기 이상의 유래비가 세워졌다.
이 중에서 갈미 유허비는 1986년 공단 편입으로 조상의 산소까지 옮겨야 하였고 1994년 이웃 동네인 신당동으로 집단 이주까지 하여야 하였던 갈산동 주민들이 조상들의 삶의 자취와 유래를 후세에 전하고자 1996년에 건립하였다. 갈미마을 지역은 예부터 낙동강이 상습적으로 범람하던 곳이었기에, 갈미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거듭되는 수해에, 때로는 가뭄까지 겪으면서도 끈질기게 가난을 이겨내며 살아왔다. 1960년대에 낙동강 제방이 완공되면서 수해에서 간신히 벗어났으나, 이어 닥친 산업화라는 물결은 이겨낼 수 없었던 것이다.
[위치]
갈미 유허비는 대구광역시 달서구 성서서로 195[갈산동 390-1] 공단 지역 내에 있다.
[형태]
갈미 유허비에는 직사각형의 석재로 이루어져 있다. 비석에는 마을의 유래와 역사, 주변의 자연환경, 주민들의 성씨, 고향을 떠나야 하는 심정 등과 함께 「내 고향 갈미」, 「이향탄(離鄕嘆)」이라는 두 편의 시가 새겨져 있다.
[금석문]
비의 앞면 맨 오른쪽에는 세로쓰기로 ‘갈미 유허비’라고 새겨져 있고 이어서 세로쓰기로 새겨진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갈미 마을은 동쪽에 이 남쪽에 멀리 琵瑟山이 서쪽에 伽倻山과 낙동강이 북쪽에 臥龍山이 둘러 있는 곳이다. 갈미란 마을 이름은 옛 문헌에 加乙山里 또는 葛山里로 되어 있으나 이는 갈미란 우리말을 발음 그대로 漢子로 표기한 것일 뿐이고 마을 뒤 큰 갓인 加乙山에 갈나무(떡갈나무)가 많이 자란데서 유래했다 한다. 갈미마을은 지금부터 약450년 전에 東萊鄭氏가 처음 터를 잡았고 이어서 金海許氏·星主李氏가 이주해 왔고, 그 후로 咸安趙氏·達城裵氏·達城徐氏·永同金氏·慶州李氏·密陽孫氏·星州都氏·淸州楊氏·密陽朴氏·潘南朴氏·大邱夏氏·平山申氏·昌寧成氏·仁同張氏·金海金氏·海州吳氏·潭陽田氏·文化柳氏·全州李氏·慶州崔氏·南陽洪氏·驪陽陳氏·天安全氏 등 여러 성씨가 정착하여 약 150호의 큰 마을이 되었다. 生業은 농업으로 두레, 품앗이, □, 계 등으로 서로 도와 살아왔으며, 교육에도 힘을 써 큰 갓 밑에 서당을 짓고, 一山선생을 모셔 가르침을 베풀기도 했다. 이곳은 주위에 큰 산이 없어 물이 귀하여 논농사는 보잘 것이 없는데다가 잦은 낙동강의 범람과…… 이 살미들은 못자리 없이 처음 삶은 논밭에 바로 볍씨를 점파하는 삶이식 농사법으로 산두를 많이 재배했으므로 ‘살미들’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 살미들 주위에는 원덩·하살미·한들·새개·망상굼·오랫들 등 낮은 지대가 많아 “메기가 하품만 해도 물이 담는다”는 말까지 나왔다. …… 1986년 성서공단 조성으로 산과 들이 공장 터로 바뀌고, 조상들의 산소도 옮겨졌으며, 1994년에는 조상 대대로 살던 집도 비우고, 이웃 신당동 앞으로 집단 이주하게 되었다. 우리들은 이제 새로운 삶의 길을 찾아가야 할 것이나, 지금의 이만한 모습을 갖추게 된 것도, 모두가 우리 조상들이 고향을 가꾸고 지켜온 은덕이라 할 것이니, 이에 우리 후세들에게 조상들의 삶의 자취와 유래를 전하고자 옛터 한 자락에 이 비를 세운다.
1996년 봄
갈미사람들 뜻을 모아”
[현황]
갈미 유허비는 공단 지역 내 도로변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길미마을의 옛 풍경을 전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마을 주민들이 힘을 합쳐 세운 갈미 유허비에는 지명 유래, 마을 역사, 주민 성씨, 비를 세운 이유 등이 새겨져 있다. 비문을 통하여 지역의 변천 과정이나 지금은 사라져 버린 갈미의 옛 지명 일부를 확인할 수 있어 사료적 가치도 인정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