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자는 이원(而遠), 호는 사정(思亭)이다. 직장 윤영(尹瑛)의 아들이다. 1624년(인조 2)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28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을 역임하고, 정언, 지평, 병조좌랑, 교리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공양이 남달랐다. 1634년 인조가 그의 친어버이를 숭봉하려 하자 양사가 이...
-
청주에 오랫동안 살아온 토박이 성씨. 성(姓)은 혈족관계를 나타내기 위하여 제정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성을 널리 쓰게 된 것은 고려 중엽부터이다. 성에는 관(貫)이라는 것이 있는데, 적(籍)·본(本)·본관(本貫)·관향(貫鄕)이라고도 한다. 이는 씨족의 근거지가 되는 지명에서 취하여 진 것으로 그 씨족의 우월성을 나타내기 위한 의도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성이...
-
조선 후기 이인좌(李麟佐)의 난(무신란) 때 충청병영의 무신.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초명은 진(震), 자는 춘경(春卿)이다. 첨절제사 홍수명(洪受命)의 아들이다. 충청병마절도사 이봉상(李鳳祥)[1676~1728]에 의하여 청백함이 인정되어 1727년(영조 3) 막료가 되었다. 이인좌의 난으로 1728년 청주읍성이 함락되고 이봉상이 잡힌 다음 죽음을 당하자, 그는 자신이 절도사라...
-
조선후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자는 원구(元九), 호는 만주(晩洲)이다. 청주 판교리(현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면 수산리)를 근거지로 한 남양홍씨 집안의 인물이다. 아버지는 홍이정(洪頤正), 할아버지는 홍순각(洪純慤), 증조할아버지는 홍해(洪瀣), 외할아버지는 남충원(南忠元), 장인은 김발이다. 아들로 홍일우(洪一宇) 등 4형제를 두었고, 동생으로 홍석주(洪錫周)가 있다...
-
조선후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자는 만계(晩溪)로 청주 판교리(현 청원군 미원면 수산리)를 근거지로 한 남양홍씨 집안의 인물이다. 태사(太師) 홍은열(洪殷悅)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홍이정(洪頤正), 할아버지는 홍순각(洪純慤)이다. 타고난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아홉 살 때 병든 어머니께서 민물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자 마침 장마로 물이 넘쳐 강가에 그물을 치고 슬프게...
-
조선 전기의 문인.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자는 근초(謹初), 호는 쌍백당(雙栢堂)·쌍백당이다. 아버지는 홍해(洪瀣)이며, 거주지는 청주 산내일면 판교리(현 청원군 미원면 수산리)이다. 부인은 경주이씨(慶州李氏)로 섬계서당을 열어 조선 중기 청주지역 사림들의 교육에 앞장 선 이잠(李潛)의 딸이다. 동생으로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추증된 홍순선(洪純善)과 집의(執義)를 지낸 홍순일(...
-
청주시에서 활동한 언론인이며, 행정가.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호는 청곡(淸谷)으로 충청북도 괴산군 청안면에서 태어났다. 경성협성실업을 졸업한 뒤, 언론계로 투신하였다. 동아일보 인천주재 기자를 시작으로 광복 이후에는 동아일보 청주지국장, 주간동아 충북판 발행인, 지금의 충청일보 전신인 충북신보 주간 등을 역임하며 언론활동을 하였다. 초대 충북도의회 의원을...
-
조선 후기의 무신. 충청도 병마절도사를 지냈고, 동학농민전쟁 때 정부군을 이끌었던 조선 말기의 무관이다.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자는 성남(聖南), 호는 규산(圭珊)이다. 초명이 재희(在羲)이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壬午軍亂)이 발발하였을 때 무예별감(武藝別監)으로 있었는데, 명성황후(明成皇后)를 궁궐에서 탈출시킨 공으로 중용되었다. 1887년에는 충청병마절도사로 청...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자는 문백(文伯)이다. 효자로 정려된 증참판 홍석무(洪錫武)의 손자이다. 부인은 박이환(朴而煥)의 따님인 상주박씨(尙州朴氏)이다. 천성이 효성이 깊고, 부모병환에 축문을 지어 손바닥을 불을 놓아 하늘에 빌었다. 부모의 상을 당해 여막(廬幕)에서 거처하며 애도함이 도에 지나칠 정도였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학문이 고명하여...
-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자는 군실(君實), 호는 만은(晩隱)이다. 홍일운(洪一運)의 아들이며 홍석무(洪錫武)의 손자이다. 부모가 여러 해 된 이질로 누워 계신 가운데, 그는 십리쯤 떨어져 살았으므로 문병차 밤에 자주 왕래하였는데 늘 범이 길을 인도하여 주었다고 한다. 부모 병환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드려서 구하였다. 묘소앞의 여막(廬幕)에서 삼년 상을 치루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