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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936
한자 庾昌淳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내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1년 3월 17일연표보기 - 유창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3년 - 유창순 풍기 광복단 결성
활동 시기/일시 1915년 - 유창순 대한 광복회 결성에 참가
활동 시기/일시 1917년 11월 - 유창순 친일 부호 장승원 처단
활동 시기/일시 1919년 9월 22일 - 유창순 경성 복심 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음
몰년 시기/일시 1944년 9월 10일연표보기 - 유창순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3년 - 유창순 건국 훈장 독립장 추서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천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유창순(庾昌淳)[1881~1944]은 충청남도 천원군을 본적지로 하나 그 외 가계나 학력 등 자세한 사항을 알 수 없다. 1913년 경상북도 풍기(豊基)에서 풍기 광복단(豊基光復團)을 결성하였고, 1915년 대한 광복회(大韓光復會) 결성에 참가하였다. 1917년 11월 전 경상도 관찰사(前 慶尙道觀察使)인 친일 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하였다.

[활동 사항]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유창순은 국권 회복을 위해 채기중(蔡基中)·유장렬(柳璋烈)·한훈(韓焄)·강순필(姜順必)·김병렬(金炳烈)·정만교(鄭萬敎)·김상오(金相五)·정운홍(鄭雲洪)·정진화(鄭鎭華) 등과 함께 1913년 풍기에서 풍기 광복단을 결성하였다. 주로 의병 성향의 인물이 참여했던 풍기 광복단은 독립군 양성을 위한 무기 구입과 군자금 모집에 실천 방략을 두고 독립운동을 폈다. 그 후 유창순은 풍기 광복단과 조선 국권 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이 통합하여 1915년 대한 광복회가 결성되자 이에 참가하여 친일 부호 처단에 앞장섰다.

대한 광복회는 국내에서 군자금을 조달하여 만주의 독립군 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고, 국내에 확보한 혁명 기지를 거점으로 적시에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것을 계획하였다. 행동 지침은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대 강령이었고, 혁명 계획은 군자금 조달·독립군 및 혁명군의 기지 건설·의협 투쟁으로서의 총독 처단과 친일 부호 처단 등으로 추진되었다.

이를 위해 유창순은 경상도 지방의 친일 부호를 조사하여 명단을 작성하는 한편, 그들에게 보내는 광복회 명의의 포고문을 발송하는 등 친일 부호 처단에 필요한 준비를 진행하였다. 그리하여 1917년 11월에는 채기중(蔡基中)·강순필·임봉주(林鳳柱) 등과 함께 경상북도 칠곡에 거주하고 있던 전 경상도 관찰사이자 친일 부호인 장승원을 처단하였으며, 이때 광복회 명의의 처단 고시문을 붙임으로써 광복회를 만천하에 알렸다. 그러나 이 일로 말미암아 대한 광복회 조직이 드러나 유창순은 1918년 11월에 체포되어 공주 지방 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1919년 9월 22일 경성 복심 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44년 9월 10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유창순의 공훈을 기려 1963년에 건국 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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