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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5008
한자 百濟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백제
집필자 강종원

[정의]

삼국 시대 천안 지역을 관할했던 고대 국가 중의 하나.

[개설]

기원전 18년에 성립되어 660년 나·당군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한반도 서남부에 존재했던 나라로 마한(馬韓) 50여 개의 소국을 병합하여 고대 국가로 발전하였다.

[변천]

백제(百濟)는 한강 유역에 자리를 잡은 마한 소국의 하나인 백제(伯濟)가 주변 소국들을 병합하면서 고대 국가로 발전되었다. 건국 설화에 의하면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의 아들 온조(溫祚)가 남쪽으로 내려와 한강 하류 유역에서 나라를 세운 것으로 전한다. 백제는 건국 과정이 분명치는 않으나, 부여족 계통의 고구려 유민들에 의해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백제는 차츰 마한 소국들을 병합하고 한반도 서북한에 설치된 중국의 군현세력을 물리치면서 한강 유역의 중심 세력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3세기 중엽 고이왕(古爾王, 234~286) 때는 마한 연맹체의 맹주국인 목지국을 병합하고, 안으로 관제를 정비하는 등 고대 국가로서의 기반을 갖추었다. 이어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때는 영산강 유역의 마한 세력을 통합하고 고구려의 남침을 제압하여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전사시킬 정도로 영토를 크게 확장시켜 중앙집권적 귀족 국가를 완성하였다.

그 뒤 고구려의 남진 정책으로 한강 유역을 고구려에게 빼앗기고 475년 수도를 웅진으로 옮겨 재기를 시도하였으며, 538년(성왕 16)에는 다시 사비로 천도하여 중흥을 꾀하였다. 그렇지만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한 전쟁과 신라와의 지속적인 전쟁, 그리고 당과의 외교 정책 실패 등에 따른 국론 분열로 나·당군의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660년 사비도성이 함락되었다. 이후 3년간에 걸쳐 국권 회복을 위한 부흥 전쟁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백제 시대의 천안]

백제 시대 천안은 지금의 목천 일대에 대목악군(大木岳郡)이 행정 구역으로 편제되었으며, 풍세면·광덕면 지역에는 감매현(甘買縣), 직산 지역에는 사산현(蛇山縣)이 있었다. 『삼국사기』지리지에는 사산현이 고구려의 영토로 되어 있는데, 이는 백제의 영토였던 사산현이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된 까닭으로 보인다.

천안 지역이 백제의 영역으로 편입된 시기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백제의 첫 도읍지를 천안 지역으로 보는 견해와 3세기~4세기쯤에 백제에 편제되었다고 보는 견해이다. 온조왕은 기원전 18년에 국가를 세우고 국호를 백제라 하였다. 이때 도읍으로 삼은 곳이 위례성이었는데, 『삼국유사(三國遺事)』 등에 직산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외에 조선 시대 각종 지리지 등에도 직산을 초도지로 기록하였는데, 위례성의 명칭을 가진 산성의 존재, 백제 건국의 10대 공신으로 일컬어지는 조성과 전섭의 후예가 천안 지역에 거주하였다는 점 등을 통해 직산이 백제의 첫 도읍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온조왕이 처음 도읍으로 삼았던 위례성을 한강 이북에서 구하고 있으며, 구체적으로는 중랑천 일대로 보는 견해가 다수를 차지한다. 그리고 기원전 5년에 한강 이북에서 한강 이남으로 왕도를 옮겼는데, 이때 하남 위례성은 한성과 동일한 것으로 그 위치는 경기도 광주를 비롯해 남한산성, 풍납토성, 몽촌토성 등에 비정된다. 현재까지의 고고학적인 성과를 토대로 보면 풍납토성이 온조왕 14년에 천도한 하남 위례성일 가능성이 높다.

백제는 마한 50여 소국을 병합해서 백제라는 고대 국가로 발전하였는데, 천안 지역에 비정되는 소국으로는 마한 연맹체의 맹주국이었던 목지국(目支國)이 있다. 그리고 목지국이 백제에 병합된 시기는 대개 고이왕 시기로 추정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온조왕 26·27년 조에 마한을 병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 병합된 마한이 사실은 목지국이며, 그 시기도 고이왕 대라는 것이다. 따라서 천안 지역이 백제의 영역으로 편제된 시기는 3세기 후반이라고 하겠다.

백제의 왕도가 웅진으로 옮겨온 475년 이후 천안 지역은 고구려와의 군사적 대치상황에서 중요한 지리적 위치에 놓이게 된다. 문주왕은 476년에 한강 이북의 백성들을 대두산성에 이주시켰는데, 이들이 사민(徙民)된 지역이 바로 천안 일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문주왕은 천안 지역에 백성들을 사민시켜 고구려의 남진을 방어하고자 했던 것이다.

[백제 시대의 유물과 유적]

천안 지역에는 백제 시대의 문화상을 파악할 수 있는 다수의 유적이 분포하고 있는데, 분묘 유적 및 관방 유적, 생산 유적 등이 확인된다. 이들 유적 가운데 당시 천안 지역의 성격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주목되는 것이 화성리 고분군과 용원리 고분군이다. 이들 고분군의 조성 연대는 4세기 중후반에서 5세기 정도로 편년된다. 그리고 고분에서는 용봉문 둥근 고리 칼, 중국제 도자기, 검은 간 토기 등 위신재(威信財)가 다량으로 출토되었는데, 무덤 주인공의 정치적 위상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들 유물은 중앙에서 사여된 물품으로 당시 이 지역의 재지 세력이 백제 중앙과 정치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천안지역이 백제의 남방 진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지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관방 유적으로는 백석동 토성 및 직산 사산성이 있는데, 이들 유적은 475년 웅진천도 이후 천안 지역이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음을 말해 준다.

[관련 자료]

『삼국유사』권1 왕력 백제 온조왕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동명왕의 셋째 아들 또는 둘째라고도 한다. 계묘년(기원전 18)에 즉위하여 45년간 왕위에 있었다.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하였으니 또는 사천(蛇川)이라고도 하였다. 지금의 직산이다. 병진(기원전 5)에 한산으로 도읍을 옮기니 지금의 광주이다.”

『삼국사기』권23 온조왕 27년에는 “4월 원산과 금현 두 성이 항복하므로 그곳 백성들을 한산 북쪽으로 옮기니 마한은 마침내 멸망하였다. 7월에 대두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고, 온조왕 36년에는 “7월에 탕정성을 쌓고 대두성의 민호를 나누어 옮겨 살게 하였다. 8월에 원산과 금현의 2성을 수리하고 고사부리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참고 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이병도, 『한국 고대사연구』(박영사, 1976)

강종원, 「천안 위례성에 대한 문헌사학적 검토」(『위례산성』, 서경, 2003)

이경복, 「백제의 천안지역 진출과 천안 용원리세력」(『백제와 주변세계』, 진인진, 2012)

이현숙, 「4~5세기 백제의 지역상 연구」(고려대 대학원 박사 학위 논문. 2011)

『용원리 고분군』(공주 대학교 박물관, 2000)

『위례산성』(충남 대학교 백제 연구소, 2003)

『천안의 마한·백제』(천안 박물관·국립 공주 박물관, 2011)

『천안 성거산 위례성 학술 조사 보고서』(천안시·충남 역사 문화 연구원, 2011)

『천안시지』(천안시지 편찬 위원회,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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