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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천장과 박문수 묫자리」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2180
한자 幷川場-朴文秀-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주경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1991년 1월 10일 - 상명 대학교 구비 문학 연구회 한진일, 김희정 등이 박일수에게 채록
수록|간행 시기/일시 1996년 10월 5일 - 『구비 문학 대관』에 수록
관련 지명 박문수 어사 묘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북면 은지리 지도보기
관련 지명 아우내장터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병천리 지도보기
관련 지명 은석산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북면 용암리 지도보기
관련 지명 은석사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북면 은지리 지도보기
채록지 관성리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관성리 지도보기
성격 전설|풍수지리담
주요 등장 인물 박문수|시종|박 사부
모티프 유형 자손이 적은 묫자리|하인 묫자리보다 못한 상전 묫자리

[정의]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면과 북면 인근에서 전해 내려오는 박문수의 묫자리와 관련된 이야기.

[개설]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면과 북면, 병천면 부근에는 어사 박문수(朴文秀)[1691~1756]와 관련한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박문수의 생가와 묘가 천안시 북면에 자리하고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박문수는 정의를 실현하고 백성의 고달픈 삶에 희망을 준 암행어사(暗行御史)였지만 후손은 크게 번성하지 못하였다. 「병천장과 박문수 묫자리」박문수의 후손이 번성하지 못한 이유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채록/수집 상황]

상명 대학교 구비 문학 연구회의 한진일, 김희정, 임성은, 한승원이 1990년 1월 10일 박일수[62세, 남,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관성리]에게 채록하여 1996년 천안 문화원에서 발간한 『구비 문학 대관』에 수록하였다.

[내용]

박문수가 의관동[지금의 병천면 관성리]에 사는 박 사부와 함께 충청북도의 만뢰산(萬賴山)으로 묫자리를 보러 갔다. 박문수와 박 사부는 만뢰산에 올라가서 산천을 보고 내려오면서 명당을 찾기로 하였다. 박 사부는 산의 왼쪽으로 내려오는 길에 의동[지금의 병천면 관성리]이라는 곳에 자리를 정하였고, 박문수는 오른쪽으로 내려오다가 서쪽 방향으로 향하니 은석산(銀石山)에 묫자리로 괜찮은 곳이 있어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박문수가 묫자리를 보러 가는 길에 수행한 시종이 한 명 있었다. 박문수는 ‘내 묫자리만 정하지 말고 시종도 하나 정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산을 더 내려오는데 병천면북면의 경계 지역에 다다르니 꽤 괜찮은 명당이 나타났다. 박문수는 시종에게 “내 자리를 여기다 정할 테니 너는 아까 저기 은석산으로 정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고 물었다. 시종은 은석산 보다 그곳이 더 좋은 묫자리라 생각하고는 “아, 어떻게 소인이 대감 위에 있겠습니까? 살아서나 죽어서나 마찬가지인데 그냥 대감은 거기로 정하시고 저는 여기다 정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박문수는 할 수 없이 아래쪽 명당을 시종의 묫자리로 잡아 주었다. 은석산의 묫자리도 좋은 곳이지만 그곳은 손(孫)이 적은 곳이었다. 시종은 경주 김씨인데, 박문수 덕분에 묫자리를 잘 써서 후손이 많이 번성하였다.

박문수는 자기 묫자리를 정하고 나서 병천장이 세 번 옮기거든 은석사 절터 장독대로 묘를 옮기라고 유언하였다. 그러나 후손이 변변치 않아 병천 아우내장터가 세 번 옮겼어도 묘를 이장할 후손이 없었다. 실제로 박문수는 7대는 양손을, 8대 혈손을 두었다. 7대까지 혈손이 낳은 자식이 없어 친척 중에서 양자를 들였고 7대 양자를 한 뒤에 아들을 낳아 8대에 혈손이 뒤를 이었다.

[모티프 분석]

묫자리를 잘 써서 후손이 번성하였다거나 묫자리를 잘못 써서 후손을 잇지 못하였다는 풍수지리담은 전국에 걸쳐 전해 내려오는 민담이다. 그래서 예부터 묫자리를 정하는 일은 사람의 일생에서 매우 중요한 일로 여겨졌다. 「병천장과 박문수 묫자리」박문수가 손(孫)이 적은 묫자리를 쓰는 바람에 후손이 번성하지 못하였고, 박문수가 정하여 준 시종의 묫자리는 명당이어서 시종의 후손이 번성하였다는 이야기이다. 결국 시종보다 못한 묫자리를 쓴 상전 덕분에 후손이 시종보다 못하게 된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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