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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1968
한자 王神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강성복

[정의]

충청남도 천안시에서 조상이 되지 못한 채 억울하게 죽은 넋을 달래주고자 집안에 모신 신.

[개설]

왕신은 혼인하지 못하고 죽은 딸이나 젊어서 원통하게 죽은 귀신을 의미한다. 따라서 왕신은 조상이 되지 못하여 제사를 받을 수 없는 원혼을 지칭한다. 처녀귀신은 한이 맺혀 죽은 혼신이므로 매우 사납고 까다로운 존재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심술을 부려 집안에 해를 끼칠 수도 있는 까닭에 그 넋을 위로하고 달래려고 왕신으로 모시는 것이다. 왕신은 집안 내에 혼령을 받든다는 점에서 가신(家神)의 하나로 인식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터주·성주조왕제석 등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가신과는 일정한 차이가 있다.

[내용]

왕신은 안방의 벽장이나 장독대 뒤편에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며, 그 신체(神體)는 항아리나 작은 단지이다. 그 속에는 나락을 넣고 망자의 이름과 사주(四柱)를 적은 천을 모신다. 집안에 따라서는 처녀가 사용하던 참빗이나 얼레빗 등을 넣어 두기도 한다. 해마다 가을걷이를 마치면 왕신 단지에 넣을 햇벼는 따로 갈무리해 두었다가 왕신을 모시는 날 갈아 준다. 이때 묵은 벼는 버리지 않고 밥을 해 먹는다.

왕신은 말 그대로 집안에 깃든 여러 신령 중에서 왕처럼 으뜸으로 모시는 신이라는 뜻을 지닌다. 그만큼 왕신을 모시기가 까다롭기 때문이다. 왕신을 모신 가정에서는 평소 집 안으로 들어오는 물건은 무엇이든 왕신에게 먼저 가져다 놓아야 한다. 옷감이나 신발은 물론이고 돈과 음식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외출할 때에는 왕신에게 먼저 인사를 드려야 하고, 집에 돌아와서도 역시 인사를 올린다. 심지어 집에 손님이 찾아와도 왕신한테 먼저 인사를 할 정도로 극진하게 위하지 않으면 집안이 망하거나 멀쩡한 사람이 죽어 나가는 액운을 당한다고 한다. 그래서 ‘왕신 위하듯 한다.’라는 말도 생겨났다.

[왕신을 없앤 며느리]

왕신 단지는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다. 왕신은 자칫하면 곧바로 집안에 탈을 부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천안에는 갓 시집온 며느리가 왕신을 물리쳤다는 민담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에 천안에 떡장수를 하는 집이 있었다. 딸이 병을 얻어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자 왕신으로 모시게 되었다. 안방의 벽장에 신주를 모시는 감실을 설치하고 항아리에 죽은 딸이 사용하던 참빗을 넣어 두었다. 훗날 그 집 아들이 장성하여 장가 들 나이가 되었지만 왕신을 모신 집이라 하여 중매가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애를 태우고 있는데, 한번은 용케도 시집을 오겠다는 아가씨가 있어 어렵사리 혼인하게 되었다.

본가에서 혼례를 치르고 며느리가 집안으로 들어오는 날이었다. 새색시는 시댁에서 왕신을 모신다는 이야기를 진작부터 들었던 터라 왕신을 없앨 요량으로, “가마가 도착하기 전에 구정물을 한 솥단지 끓여 달라.”라고 부탁했다. 마침내 시댁에 도착하여 왕신에게 절을 올릴 차례가 되었다. 그때 며느리는 느닷없이 펄펄 끓는 구정물을 안방으로 가지고 가더니 왕신 단지에 퍼부어 댔다. 그러자 왕신 단지가 뜨거운 물에 견디지 못하고 쩍 하고 갈라졌다.

시댁에서는 너무나 놀라 쩔쩔 매고 있는데, 이튿날에도 며느리는 또 끓는 구정물을 뿌리는 것이었다. 그날 밤 시어머니의 꿈에 왕신이 나타나서 이르기를 “어디서 그렇게 독한 것을 며느리로 얻었냐? 내가 지금 머리가 다 갈라지고 몸이 갈기갈기 찢기어 죽게 되었으니 동네 숲거리에다 모셔 주거라.”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며느리는 왕신 단지와 그 속에 들어 있던 물건을 부수어 가루를 내고는 태워서 숲거리에 버렸다. 그리고 사흘째 되는 날 며느리는 쌀 한 말로 밥을 지어 마당에 차리고 그 앞에 부엌칼 열두 개를 꽂아 놓고 “이걸 먹고 뚝 떨어져라. 아니면 열두 개 칼을 다 꽂을 테니, 속히 물러가라.”라고 위협하였다. 그리하여 막 시집을 온 며느리가 왕신을 떼어 내고 아무런 후환 없이 잘 살았다고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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